ADVERTISEMENT

88올림픽 주경기장 설계한 거장 김수근 유작 청주 ‘학천탕’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충북 청주시 중앙동에 있는 학천탕은 건축계 거장 김수근이 설계했다. 1988년부터 31년째 운영 중이다. 최종권 기자

충북 청주시 중앙동에 있는 학천탕은 건축계 거장 김수근이 설계했다. 1988년부터 31년째 운영 중이다. 최종권 기자

“아내에게 선물할 목욕탕을 짓고 싶습니다.”

"환갑 아내에게 선물할 목욕탕"…노신사 눈물에 김수근 수락 #88년 문 연 학천탕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 중 #박노석 대표 "학천탕은 김수근 혼 깃든 작품 옛 모습 지킬 것"

1984년 11월께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김수근 설계사무소. 충북 청주에서 올라온 60대 노신사의 제안에 건축계 거장 고 김수근(1931~1986) 선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개인 건물은 웬만하면 짓지 않는다”고 했다. 88올림픽 주경기장, 자유센터, 경동교회, 서울대 예술관, 국립청주박물관 등 내로라하는 공공시설과 예술 분야 건축물을 주로 설계하던 김 선생에게 동네 목욕탕을 지어달라는 부탁이 달가울 리 없었다.

거장의 마음을 흔든 건 아내를 향한 노신사의 사랑이었다. 그는 “아내가 참 예쁩니다.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예뻐요. 하루 스무 시간 넘게 목욕탕 구석에 앉아 평생 내 뒷바라지를 한 아내에게 환갑을 맞아 목욕탕을 선물하고 싶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 말이 없던 김수근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나도 아내에게 마음의 빚이 많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와 고생 많았지요. 한번 해보겠습니다”라며 설계를 수락했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 [중앙포토]

건축가 김수근(1931~1986) [중앙포토]

김수근이 설계한 올림픽 주경기장 전경. [중앙포토]

김수근이 설계한 올림픽 주경기장 전경. [중앙포토]

학천탕은 청주의 1세대 대중목욕탕으로 통한다. 청주 구도심인 중앙동 골목에서 31년째 운영 중이다. 고 박학래 학천탕 대표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김수근 선생에게 설계를 의뢰한 뒤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장남인 박노석(60)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박 대표는 “아버지와 함께 86년 6월 설계 모형을 찾으러 건축사 사무실에 들렀는데 직원들이 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거에요. 그날 김수근 선생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며 “몇 개월 뒤 모형을 받아 목욕탕 공사를 시작해서 올림픽이 열리는 88년 완공했다.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올림픽 주경기장과 같이 나이를 먹은 학천탕은 아버지의 유산이자 김수근의 유작으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 중인 청주 학천탕에서 박노석 대표가 리모델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 중인 청주 학천탕에서 박노석 대표가 리모델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학천탕은 연면적 2100㎡ 규모로 8층짜리 건물이다. 1~2층은 남탕, 3~4층 여탕, 5~7층 남성 VIP 사우나, 8층은 창고로 쓰고 있다. 밖에서 보면 반타원형의 건물 외벽에 층별로 햇빛이 많이 들어오도록 설계됐다. 내부는 일반 목욕시설과 다르게 실내공간과 동선으로 쓰이는 계단, 휴게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박 대표는 “상업성보다는 건축의 조형미를 더 챙긴 건물이에요. 탈의실과 탕 면적 비중을 줄이고 로비와 휴게 공간을 더 넓힌 사람 중심의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곡선으로 이어진 계단, 당시 볼 수 없었던 원형 유리 벽으로 마련한 중간탕은학천탕의 특징이다.

학천탕은 오픈한 지 30년 만에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 중이다. 기존의 건물 골격을 그대로 살리면서 1~2층을 커피숍으로 리모델링한다. 나머지 층은 목욕 시설로 운영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김수근 선생의 혼이 깃든 학천탕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목욕탕 커피숍을 생각하게 됐다”며 “탕 내부에 있는 타일을 떼고, 욕탕 경계를 허물어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옛 모습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 중인 청주 학천탕. 최종권 기자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 중인 청주 학천탕. 최종권 기자

그는 이어 “청주에서 목욕업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선친은 ‘직업을 통한 봉사활동을 하라’고 늘 말씀하셨다”며 “30년 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아름다운 목욕탕이 주민들의 쉼터이자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