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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처럼 참고 살지 말라는 엄마의 눈빛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3)

마냥 아이 같은 막내딸로 30년을 편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준비도 없이 엄마가 된 미술 전공자. 철부지 딸이 엄마가 되는 과정을 그림과 글로 그려본다. 엄마에겐 딸, 딸에겐 엄마인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기록해보는 삼대 이야기. <편집자>

엄마랑은 이런저런 깊은 이야기도 친구처럼 할 만큼 친한 모녀 사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엄마는 옛날 사람이다. 기계치이고 엄마 본인에겐 돈을 쓸 줄도 모르고 항상 가족이 우선인 엄마였는데 또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완전히 헌신적인 엄마 상은 아니었다. 네살 위의 친오빠는 그런 엄마를 항상 “소녀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릴 적 나는 정확히 어떤 포인트가 엄마가 소녀 같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도 나중에 애 낳아보면 안다”라는 말처럼 나도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보니 지난날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이 많이 이해된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했고 그래서 감사하기도 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이해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엄마는 내가 의지하고 뭐든지 들어주는 존재에서 나와 같은 여자, 이제는 내가 이해하고 돌봐주어야 할 존재로 바뀌어 가는 반환점과 같이 느껴졌다. 그제야 엄마를 왜 소녀 같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는 늘 아빠가 돈이 없는 것보다는 엄마를 자상하게 감싸줄 줄 모르는 행동에 서운해했고, 엄마가 힘들 때 일을 거들어주기보다는 그저 엄마 마음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져주길 바라는 그게 전부인 사람이었다.

아빠도 오빠도 나 역시도 아무도 해주지 않은 그 따뜻한 말 한마디를 엄마는 몇십년을 그렇게 외롭게 견디며 버텨내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자식으로서 같은 여자로서 같은 엄마로서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나는 1년에 한 번쯤 꼭 크게 부부싸움을 하는데 그럴 때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인생 선배인 엄마에게 속풀이를 했다. 엄마는 항상 “돈이라는 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신랑 고생하는 거 생각해서 너도 그만해라”라던지 “그래도 이 서방 정도면 사람 바르고 착하다. 이해하고 살아라” “너 그래서 지금 이혼하면 딸은 어떡할래?”라는 말들로 속 터지는 내 맘에 좀처럼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왜 꼭 싸우고 나면 친구보다 엄마에게 속풀이를 다 해댔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더이상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이르지 않게 된 일이 있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여느 때처럼 씩씩거리며 엄마에게 속풀이를 한껏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언제나처럼 “이해해라” ”너만 그런 거 아니다”라는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점점 더 답답해졌고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 그동안은 조금 낯간지러워하지 않았던 더욱더 깊은 곳에 있던 마음의 이야기를 했다. 늘 이게 진심이었지만 이런 감성적인 마음을 나이 많은 엄마는 이해를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별을 떤다고 하겠지 싶었다.

“엄마, 나는 정말 자상한 남자랑 살고 싶었어. 인생은 길고 나는 엄마 때처럼 참고 사는 시대는 아니잖아. 인생은 한 번인데 어떻게 평생을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줄 모르고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꼭 말로 해야 아니?’라는 사람하고 어떻게 살아. 하나도 안 행복해.

돈 때문이 아니야.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러니까 하고 평생 살기엔 인생이 아까워. 내가 다른 남자 만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안 맞으면 못사는 거지. 어딘가에 나랑 맞는 사람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지금이 안 행복한데 다른 남자 만나도 마찬가지일 테니 참고 사는 게 어딨어?”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잠깐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한숨을 좀 쉬었다. 딱히 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도 말하고 나니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해서 얼렁뚱땅 그날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며칠을 친정에 머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여느 때처럼 엄마는 밑반찬 몇 개를 만들어 싸주었고 머물면서 아이가 입었던 옷도 깨끗하게 빨아 반듯하게 개어서 쇼핑백에 담아주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엄마, 갈게요. 잘 쉬다 가요. 고마워!”
“할미! 안녕 뽀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하는 나와 딸에게 엄만 손을 흔들며 머뭇거리다 곧 닫히려는 문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딸, 정 못 살겠으면 살지 마. 집에 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아마도 내가 머무는 며칠 동안 내가 한 이야기가 마음에 많이 남아서일 테지. 그리고 ‘너는 엄마처럼 참고 살지 마’라는 이야기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엄마는 여전히 소녀다. 사랑받고 싶고 예쁜 것 좋은 것만 보고 싶은 소녀. 그리고 그런 엄마를 닮은 나도 소녀다. 아니 어쩌면 모든 여자는 평생 소녀가 아닐까.

장윤정 주부 kidsart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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