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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시니어 부시와 노태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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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1987년 9월 중순 워싱턴의 NBC TV방송국. 한국의 노태우 민정당 총재와 조지 H W 부시 미 부통령이 조우했다. 대선후보 노태우는 6·29 선언 직후 레이건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미국을 찾은 터였다. 부시도 공화당의 유력 대선후보. 인터뷰 대기실에서 두 후보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테니스 경기를 하자”고 약속했다. 한국과 미국의 제13대, 41대 대통령은 91년 7월 백악관, 92년 1월 청와대에서 테니스를 했다. 한·미 외교사에서 드문 장면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후에 “백악관 정상회담 때 부시 대통령이 ‘2층에 올라가 부인네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제안해 그렇게 한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부시(1989.1~1993.1)·노태우(1988.2~1993.2) 대통령은 역사적 대전환기를 함께했다. 부시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89년 12월 몰타)을 선언하고 핵 군축을 선도했다. 노태우는 88올림픽 유치전으로 축적한 대공산권 외교 역량을 기반으로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세계사적 흐름을 한반도로 낚아챈, 중국·소련을 지나 북한의 개혁·개방을 겨냥한 정책이다.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했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반대정책을 포기하도록 힘을 크게 썼다.”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다. 중국과 동유럽이라는 거대시장의 문을 열어 한국 성장의 도약판을 마련한 북방정책 성공 뒤에는 부시의 지지와 협력, 탄탄한 한·미 공조가 있었다.

이때는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시기. 미국의 전술핵 철수 정책을 미리 안 노태우는 부시에게서 핵우산 지속 제공 등을 확약받고(91년 9월 뉴욕회담) ‘한반도 비핵화’를 먼저 선언했다. ‘북이 핵 개발에 성공하면 안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니 명분을 줘서 핵을 못 갖게 하자는 복안’이었다고 한다. 국제 정세상 고립될 위기에 몰린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에 응했지만 ‘특별사찰’ 논란 등으로 93년 3월 핵 비확산체제(NPT)에서 탈퇴했다. 도전과 희망, 좌절의 기운이 한반도를 덮은 시기였다.

30여 년이 지난 그제 부시 대통령이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3월 방한한 부시 대통령은 병상의 노태우 대통령에게 난을 보내 ‘함께 협력했던 행복한 시간을 잊지 못한다’며 쾌유를 빌었다. 86세의 노 전 대통령은 여전히 병상에 있다. 숱한 곡절과 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핵 무력을 완성한 손자 대(代)의 북한은 또 다른 모습으로 외교 무대에 올라서 있다.

김수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