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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마크 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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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마크 헌트(44·뉴질랜드)는 늙은 사자 같았다. 초원을 호령했던 파워와 스피드가 남아 있지 않았다.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 저스틴 윌리스(31·미국)의 스텝을 쫓지 못했다.

윌리스전 0-3 판정패 끝으로 UFC 떠나 #2000년 K-1 데뷔 후 19년 싸운 '상남자' #"약물 복용자 없었다면 난 챔피언 됐을 것"

헌트는 2일(한국시간)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142 헤비급 경기에서 윌리스에 0-3 판정패했다. 4년 전 헤비급 잠정 챔피언 매치까지 치렀던 헌트는 랭킹이 10위까지 떨어져 있었다. 랭킹 15위 윌리스는 제법 영리하게 헌트와 싸웠다. 날카로운 잽으로 원거리를 유지하며 헌트의 인파이팅을 막았다. 헌트는 1라운드 리드를 잡았으나 2·3라운드에선 체력이 떨어졌다. 이따금 온 힘을 모아 라이트 훅을 날렸지만 허공만 붕붕 갈랐다. 예전에 비해 너무 느렸다.

헌트는 고향과 같은 호주에서 열린 경기를 마지막으로 UFC를 떠난다. 이번 경기로 UFC와의 계약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를 보면 계약 연장이 충분히 가능하다. 종합격투기의 메이저리그 같은 UFC를 제 발로 떠나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러나 헌트는 이번 경기를 앞두고 "나를 의붓아들처럼 홀대하는 UFC에 미련이 없다. (재계약을 제안해도) UFC를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5년 UFC 서울 대회를 기념해 서울 방문했던 마크 헌트. [중앙포토]

지난 2015년 UFC 서울 대회를 기념해 서울 방문했던 마크 헌트. [중앙포토]

헌트는 오세아니아와 북미 대륙은 물론 일본과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2000년 일본 이종격투기(킥복싱) K-1에 데뷔해 이듬해 챔피언에 오른 그는 제롬 르 밴너, 레이 세포, 마이크 크로캅 등 시대의 강타자들과 대결했다. 아무리 맞아도 끝까지 밀고 들어가는 그를 격투 팬들은 '수퍼 사모안'이라 불렀다.

헤비급 선수로는 키(1m78㎝)가 작은 그는 두꺼운 몸통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펀치력을 자랑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헌트의 두개골 두깨가 일반인의 2배"라는 말로 그의 초인적인 맷집을 설명했다. 킥복싱 전적 30승 13패.

K-1의 인기가 떨어지자 헌트는 일본 종합격투기 프라이드로 이적했다. 레슬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그가 킥복싱만으로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성공하긴 쉽지 않았다. 2006년 에밀리아넨코 표도르에게 서브미션 패를 당했다. 그래도 헌트는 계속 싸웠고 그의 그라운드 기술도 점차 발전했다.

헌트는 2010년 UFC에 진출했다. 그가 경쟁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프라이드가 UFC로 합병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데이나 화이트 UFC 대표(현 회장)는 헌트에게 "40만 달러(약 4억5000만원)를 줄테니 계약을 해지하자"고 제안했다. 헌트가 프라이드에서 받았던 파이트머니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

헌트는 계속 싸우겠다고 우겼다. 레슬링 공격은 못하더라도 태클 방어가 향상되자 헌트의 핵펀치는 UFC에서도 통했다. 종합격투기 전적은 13승 1무 14패(UFC 8승 8패 1무 1무효)로 뛰어나지 않지만 화끈한 경기 스타일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지난해까지 헌트의 파이트머니는 경기당 80만 달러(약 9억원), 보너스를 합치면 170만 달러(19억원) 정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헌트는 이번 경기를 끝으로 UFC를 떠나겠다고 확언했다. 스타성에 비해 홀대를 받았다고 여기는 데다, 자신을 이긴 파이터 중 상당수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서다.

2013년 안토니오 실바(무효)와 2014년 잠정 타이틀전 상대 파브리시우 베우둠(KO패)은 헌트와 싸운 뒤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났다. 2016년 경기 전 약물검사 양성반응을 보였던 브록 레스너(판정패)의 출전을 허락한 UFC와 소송 중이다. UFC 은퇴전을 앞두고 헌트는 "날 이긴 파이터 중 절반은 약쟁이였다. 부정행위(약물 복용)가 없었다면 난 예전에 챔피언이 됐을 것"이라며 "파이터를 꿈꾸는 소년·소녀들이 뭘 보고 배우나. 레스너처럼 사기를 쳐도 괜찮다는 건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6년 UFC200 대회에서 브록 레스너(위쪽)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마크 헌트. [연합뉴스]

2016년 UFC200 대회에서 브록 레스너(위쪽)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마크 헌트. [연합뉴스]

헌트의 발자취에는 격투기의 영욕이 담겨있다. 2000년대 초반 최고 인기를 누렸던 K-1에서 뜨겁게 싸웠고, 다른 킥복서들이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밀려나는 동안 헌트는 마흔 살 나이에 UFC 타이틀전을 치렀다. 젊은 사자 윌리스에게 패해 초원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의 강렬한 눈빛과 강력한 주먹은 살아있었다.

아웃복싱 전략으로 헌트를 판정으로 이긴 윌리스는 승리 인터뷰를 하지 않고 마이크를 헌트에게 양보했다. 헌트는 "오늘 경기에 대해 사과한다. 팬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면서 "(UFC를 떠나지만) 다른 어딘가에서 다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자존심 때문에 UFC를 떠나긴 해도 헌트는 돈을 더 벌겠다고 약속했다. 자녀가 여섯이나 되기 때문이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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