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복 연애소설> "너, 나랑 자고 싶지? "그녀가 훅 들어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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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0화 

"왜 일주일에 이틀만 도서관에 오세요? 다른 날은 뭐하시는데..."
나는 오래 묵혀둔 질문 중 하나를 꺼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조금 전, 천사의 손길로 내 얼굴을 어루만져주던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황당해하는 내 표정이 너무 리얼했던지 그녀가 적이 당황해하며 수습에 나섰다.
"아, 그러시구나. 내 일상이 궁금하다 이거지?"

작가, 그건 이미 글렀지
그녀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박사과정 수업이 있다고 했다.

"어렸을 적엔 작가가 되려고 했어. 그게 내 꿈이었는지, 아버지 꿈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하여튼 소설가가 되면 멋있겠다는 생각은 했어. 이 나이까지 안 됐으니 이젠 글렀다고 봐야지. 지금 하는 공부는 평론이야, 문학평론.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도 남의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그럴 듯한 소리를 늘어놓잖아. 나도 남의 글에 대해 그런 거나 하려고...아니, 이미 몇 군데서 하고 있지."

금요일은 아버지를 뵈러 요양원에 간다고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갔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이라고 했다.
그날도 술자리였지만 첫 데이트 때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했다. 그 후 그 말은 내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 가시가 빠져 나가는 걸 난 느꼈다.

-아.....다행이다.
나는 누나의 눈을 보며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오히려 누나가 내 눈을 피하기도 했다.

"주말엔 외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에게 국어공부 시켜주는 일을 해. 흔히 말하는 자원봉사. 내가 저번에 말했지? 결혼 3년 만에 이혼했고 아이는 없다고. 그런데 이제는 아이가 많아. 많아도 아주 많지....."

서울에는 석관동과 길음동을 가고, 어떤 때는 경기도 화성이나 강원도 홍천도 간다고 했다.
"그 애들 눈을 보면 슬퍼져.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못났잖아.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 마구 깔보는 거 말야. 어른이 그러니 아이들도 그러구.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대체로 밝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다 그런 시선은 더욱 상처가 될 테지. 그래서 특별한 애정을 느껴. 난 그 애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지만 표정을 밝게 바꿔주는 게 더 큰 임무라고 생각해."

월수월수월수월
"누나, 그런 데 갈 때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나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해 바로 들이댔다.
"....봉사할 사람이 하나 더 생기면 좋겠지.... 근데 생각 좀 해 보고...."
즉답은 못 들었지만 나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제 이 여자의 일주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난 마음이 너무 푸근해졌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백수가 된 뒤 일상의 가장 큰 변화는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로 인해 요일 개념이 완전히 헝클어진 것이었다. 평일과 주말의 차이가 없으니 다 그날이 그날 같았다. 그런데 누나를 알게 된 뒤 다시 요일 개념이 살아났다. 그녀가 도서관에 오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천지차이였다. 주말보다 월수가 좋았다. 나는 한 주에 월요일과 수요일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월수월수월수월....

그러나 이제부턴 굳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월수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너, 나랑 자고 싶지?
이자카야에서 마주앉은 지 두 시간쯤 됐을까. 얘기도 많이 나눴고 술도 꽤 마신 상태였다.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훅 들어왔다.
"너, 나랑 자고 싶지?"
말 그대로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네에???"
술이 확 깼다.
내 눈길과 표정에서 그런 맘을 읽었을까. 하지만 단언컨대 적어도 그 순간은 아니었다. 그녀는 물론 나의 드림걸이었지만, 아니 드림걸이었기에 오히려 섹스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질문을 받는 그 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답했다간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어떻게 대답할지 정말 난감한 몇 초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독심술도 하시나 봐요. ㅎㅎㅎ"
그러면서 하나를 더 보탰다.
"왜 이런 말도 있잖아요. 남자란 동물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언제 어떻게 저 여자와 잘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한다는 말이요. ㅎㅎ"
"그런 말도 있다는 거야? 김천씨가 그렇다는 거야?"

역시 고수였다. 술을 그렇게 마셔도 빈틈이 보이면 바로 찔러보는 그녀였다. 그 말에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번 첫 데이트 때 누나는 이미 내게 운명의 여자로 다가왔어요. 그날 누나의 얘기를 들으면서 무슨 범행현장에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말릴 수도 있었지만 구경만 함으로써 공범이 된 느낌이었어요. 그러곤 이젠 공범으로서 그 죄를 똑같이 나누어져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내 운명이라고 예감했죠. 이메일에 썼듯이 누나는 내가 구원하고 보호해야 할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과 당장의 섹스나 잠깐의 잠자리 같은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게 지금 제 진심입니다."

누나를 내게 천천히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어~~~김천, 위기대응법이 제법인데.....이 정도면 건배 한번 할 일인 걸."
그녀가 먼저 건배를 제안했다. 이건 사건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술은 혼자 마시는 거라고, 각자 알아서 양껏 마시는 거라고 했던 그녀다. 건배 같은 건 촌스럽다고 했던 그녀가 건배를 하자는 거다. 섹스보다 더 짜릿한 쾌거였다. 집에 든 도둑은 개가 내쫓고 가슴 속 진심은 술이 내쫓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나의 여신을 위하여!!"
나는 기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떤 바보 같은 시종이 여신을 범하겠어요?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선. 안 그래요? ㅎㅎㅎ"
나는 의기양양해진 상태였다.
그때 고수가 더 세게 훅 들어왔다.
"여신이 원한다면 어쩔 건데?"
애송이는 또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네...저는 충실한 시종으로서...제 임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나는 내 마음을 떠보기 위해 그랬을까, 아니면 진짜 그런 마음이 들어서 그랬던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나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동정심, 혹은 모성애가 느껴져 그랬던 것일까. 이유가 뭐고 심리가 어쩌고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랴. 그날 밤은 세상의 모든 생물이 잠들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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