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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3살때 학교 보내준다 끌고가 노동···日 징그럽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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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간 근로정신대 피해 소녀들. [사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간 근로정신대 피해 소녀들. [사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너무 늦었지만)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나 다행이오."

근로정신대피해자 양금덕 할머니(87) 전화 인터뷰 #“공부 시켜주고 상급학교에도 보내준다"말에 13살 때 일본행 #시너와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 닦고 페인트칠 동원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목숨 잃거나 다친 소녀들도 #고국 돌아온 뒤에는 '일본군 위안부' 오해받아 상처 #오랜 기다림에 요양병원 입원 등 건강 상태 악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29일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근로정신대 피해자 중 한 명인 양금덕(87) 할머니의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덤덤했다. 당연한 재판 결과라는 생각에서다.

양 할머니는 그토록 기다렸던 이날 재판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다.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는 양 할머니는 노환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대법원에 가지 못했다. 대신 입원 중인 병원 텔레비전으로 자신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 결과를 들었다.

대법원 선고 직후 중앙일보 기자와의 통화 중 차분했던 양 할머니의 목소리는 '일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달라졌다. 양 할머니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에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일본이라면 이제 징그럽소. 양심(마음)을 좋게 써야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이오"라며 제대로 된 사과와 손해배상을 촉구했다.

양 할머니를 비롯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삶은 눈물 그 자체였다. 양 할머니는 만 13살이던 1944년 일본으로 갔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양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상급학교에도 보내준다”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의 말에 속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됐다.

일본에서의 삶은 지옥이었다. 어린 여학생은 시너와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내는 일에 투입됐다. 비행기 외부에 페인트칠도 해야 했다. 당시 페인트 독성으로 현재도 눈이 불편하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의 원고 중 한 명인 양금덕 할머니. [뉴시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의 원고 중 한 명인 양금덕 할머니. [뉴시스]

양 할머니는 하급심 당시 직접 법정에 출석해서 한 맺힌 목소리로 당시 생활과 이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양 할머니는 “된장국과 매실장아찌, 단무지 몇 개를 먹고 일했다”며 “작업 중 지진이 나 죽을 뻔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1심이 진행되던 2013년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 전 일이었지만, 일본에 끌려가던 상황과 자신을 속인 일본인 교장의 이름도 잊지 않고 있었다.

양 할머니와 함께 소송해온 또 다른 원고들인 박해옥(88) 할머니, 김성주(89) 할머니, 이동련(88) 할머니 등의 삶도 양 할머니와 비슷했다. 이번 소송을 지원해온 광주광역시 지역 시민사회단체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본 정부는 44년 5월 무렵 광주ㆍ전남, 대전ㆍ충청 지역에서 10대 소녀 약 300여 명을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데려갔다.

양금덕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15년 6월 미쓰비시를 상대로한 손해배상 소송의 2심에서도 승소한 뒤 광주고법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중앙포토]

양금덕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15년 6월 미쓰비시를 상대로한 손해배상 소송의 2심에서도 승소한 뒤 광주고법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중앙포토]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할머니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를 받아서다. 이 문제로 남편과 불화를 겪기도 했다. 강제 동원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은 자신은 물론 부모와 형제ㆍ자매까지 오해를 사고 피해를 입자 고향 땅에서도 평생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고령인 할머니들은 일본에서의 고통과 노환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양 할머니 등 대다수 원고들이 ‘73년의 기다림’에도 이날 대법원을 직접 찾지 못한 이유다. 박 할머니는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이고 이 할머니는 병환이 있다. 44년 12월 일본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 때 발목을 다친 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다. 또 다른 당사자인 고 김순례씨는 당시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고, 고 김복례씨는 2001년 작고했다. 김순례씨의 오빠이자 김복례씨의 남편인 김중곤(94)씨가 원고로 나서 이번 소송에 참여했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사건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와 함께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여성 인권 침해 사례로 손꼽힌다. 미쓰비시 측이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고령의 피해 할머니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소송’을 벌여오다가 이날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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