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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입은 이웅열 "옷 튀죠? 회장 그만두려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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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이 28일 "내년부터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오너 경영인이 지분 승계 없이 퇴진하는 것은 이례적이어서 배경을 두고 관심이 쏠린다. [사진 코오롱그룹]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이 28일 "내년부터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오너 경영인이 지분 승계 없이 퇴진하는 것은 이례적이어서 배경을 두고 관심이 쏠린다. [사진 코오롱그룹]

이웅열(62) 코오롱그룹 회장이 28일 “내년부터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재벌기업 오너 경영인이 갑작스레 퇴진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오랫동안 고민해온 결과라는 게 이 회장과 그룹 측이 설명이다.

이 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 마곡동 코오롱원앤온리 타워에서 임직원 200여 명과 함께 사내 포럼인 ‘성공퍼즐세션’에 참석했다. 평소 이 자리에서 좀처럼 발언을 하지 않던 이 회장은 이날 포럼 말미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은 뒤 연단에 올라 ‘폭탄 선언’을 내놨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연단에 오른 이 회장은 “오늘 내 옷차림이 색다르죠? 제 얘기를 들으면 왜 이렇게 입고 왔는지 이해가 갈 겁니다”라고 말한 뒤 준비한 편지를 읽었다. 그는 이 글에서 “내년부터 그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다. 코오롱그룹 회장직과 대표이사, 이사직도 그만두겠다. 앞으로 그룹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를 읽는 동안 이 회장은 스스로 감정이 복받친 듯 목소리가 떨렸다. 참석한 직원 일부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룹 내에 생중계된 포럼 이후 이 회장은 연단 앞 임직원들과 악수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사내 인트라넷엔 ‘코오롱 가족 여러분께’라는 제목의 서신을 올렸다.
이 회장은 서신에서 “앞으로 경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고 회사에서 여러분들에게서 ‘회장님’으로 불리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이어 “1996년 40세에 회장직을 맡았을 때, 20년만 운전대를 잡겠다고 다짐했는데 3년의 세월이 더 지나갔다”며 “지금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난다”고 말했다.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이 28일 서울 마곡동 코오롱원앤온리 타워에서 퇴진을 선언한 뒤 임직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코오롱그룹]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이 28일 서울 마곡동 코오롱원앤온리 타워에서 퇴진을 선언한 뒤 임직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코오롱그룹]

이후 행보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이 회장은 “저보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한다. 특별하게 살아온 것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책임감도 컸다”며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하지만, 특권도 책임감도 내려놓겠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코오롱 밖에서 펼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새로 창업의 길을 가겠다”며 “새 일터에서 성공의 단맛을 볼 준비가 돼 있습니다. 까짓거 마음대로 안 되면 어떻습니까. 이젠 망할 권리까지 생겼는데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너 경영인의 갑작스러운 은퇴선언에 재계에선 배경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룹 관계자는 “서신에 나온 대로 오랫동안 생각해온 결심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며 “평소에도 ‘내가 그룹의 걸림돌이 된다고 느끼는 순간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을 하셨다”고 말했다. “청바지 차림으로 온 것 자체가 서신에서 밝힌 ‘청년 이웅열’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코오롱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합성섬유 ‘나일론’을 들여온 기업이다. 창업주인 이원만(1904~2004) 전 회장이 1935년 설립해 57년 국내 최초의 나일론 제조회사인 한국나일론을 설립했다. 함께 그룹을 키운 아들 이동찬(1922~2014) 명예회장이 77년 경영권을 물려받았고, 이 명예회장은 74세이던 96년 다시 이웅열 회장에게 그룹을 승계했다.
이 명예회장 역시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뒤 경영엔 간섭하지 않았다. 자신의 호를 딴 ‘우정(牛汀)선행상’과 직접 창설한 한국오픈 골프대회만 챙겼다.

이규호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 [사진 코오롱그룹]

이규호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 [사진 코오롱그룹]

이 회장 역시 퇴임 이후 ‘창업’의 뜻을 밝혔지만 어떤 행보를 걸을지는 알 수 없다. 재계 관계자는 “평소 이 회장이 친분이 깊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사회적 가치’에 관심이 많았다.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지 않겠느냐”고 내다보기도 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20년 간 투자한 끝에 세계 최초 관절염 세포유전자치료제 ‘인보사’를 개발한 뒤 이 회장이 바이오·벤처 사업에도 관심을 보인 걸로 안다. 이런 사업에 도전할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퇴임이 다른 대기업의 승계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된다. 이 회장은 지주회사인 코오롱 지분 49.7%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날 그룹 인사에서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임명된 이 회장의 아들 이규호(35) 전무는 지주회사 지분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룹 관계자는 “일반적인 대기업 승계처럼 지분 이전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전무에게 바로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핵심 사업을 총괄하도록 해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게 한 것이며 앞으로 각 계열사 사장단이 참여하는 경영협의체 ‘원앤온리(One & Only)위원회’에서 주요 경영 결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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