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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 女과학자 조선영…교수 10번 떨어진 슬픈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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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조선영 교수가 지난 23일 경남 진주 경상대 교정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조선영 교수가 지난 23일 경남 진주 경상대 교정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늦깎이로 박사가 된 지방대의 ‘경력 단절 여성’시간강사가 세계 최고의 과학자 반열에 올랐다. 경남 진주 경상대학교 수학과의 조선영(45)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단독] 3년째 상위 1%인데 아직도 시간강사

국제 학술정보분석업체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옛 톰슨 로이터)는 27일 ‘2018년 연구성과 세계 상위 1% 연구자(HCR:Higly Cited Researcher)’6000명을 발표했다. 이 중에는 조 박사를 포함한 한국 과학자 53명이 포함됐다. 유전자가위의 세계적 권위자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과 박남규 성균관대 교수, 유룡ㆍ이상엽 KAIST 교수, 서울대 현택환 교수 등 석학들과 함께다. 지난해 유리천장을 깨고 HCR에 올라 화제가 됐던 박은정 경희대 교수도 이름을 다시 올렸다. 조 박사의 HCR 선정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2016년 처음으로 HCR에 오른 뒤 올해까지 연이어 세차례다.

박사 졸업 때 SCI급 논문만 40편

조 박사는 학위를 마칠 때 SCI(국제 과학논문 색인)급 학술지에 40편이 넘는 논문을 실었다. 비슷한 시기 졸업한 동문들이 겨우 1~2편을 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적이다. 최근까지 그의 SCI급 논문은 80편이 넘었다. 세계 상위 1% 연구자, 즉 HCR은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쓰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다른 학자들이 논문을 얼마나 인용했는지를 보여주는 피인용 지수가 평가 대상이다. 실제로 학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보는 지수다.

그의 전공은 수학 중에서도 ‘비선형 해석학’이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현상을 함수로 풀어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흐릿한 카메라의 이미지 복원과 교통신호 체계 분석 등 실생활의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분야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비선형 해석학의 쓰임새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조선영 교수가 지난 23일 경남 진주 경상대 연구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조선영 교수가 지난 23일 경남 진주 경상대 연구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방대, 경력단절, 애 엄마가 장애물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수학 박사가 왜 아직 시간강사에 머물러 있을까.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그간 국내 여러 대학에 10차례 넘게 원서를 냈지만 교수 임용에서 고배(苦杯)를 마셔야 했다. ‘가정과 일을 병행할 수 있나. 주말에 나와서 연구할 수 있나….’조 박사가 면접장에서 들어야 했던 말이다. 1차 서류면접에서만 7차례나 떨어졌다. 탁월한 학문 성과에도 불구하고, 늦깎이 지방대 박사 출신에 아이도 키워야 하는 엄마라는 점이 장애물이 됐다.

그는 중ㆍ고교 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난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수학에 대한 호기심에 학부(이화여대) 전공도 수학으로 택했다. 1998년 학부 졸업후 대학원을 꿈꿨지만 IMF 외환위기가 그를 직장으로 끌어냈다. 고향 진주에 수학교사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이 되었지만, 알고보니 사립고의 기간제 교사 자리였다. 2002년 결혼과 함께 박사후연구원을 하는 남편을 따라 뉴질랜드로 가면서 교사직도 그만둬야 했다. 이듬해엔 딸도 태어났다. 학문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지만 결혼에 이은 출산으로 여력이 없었다. 2007년,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우는 다섯살 아이를 친정에 맡겨두고 진주 경상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렇게 조 박사의 학문은 다시 이어졌다. 그는“어려운 수학문제를 해결할 때 느끼는 희열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영 교수가 지난 23일 경남 진주 경상대 교정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조선영 교수가 지난 23일 경남 진주 경상대 교정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잘 될거야 라는 응원이 더 가슴 아파" 

지난 23일 진주 경상대 자연과학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조 박사는 3년 연속 세계적 과학자에 오른 의미를 애써 부인했다. 그의 책상은‘해석학 실습실’이라 써놓은 학생용 공동 연구실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축하한다”는 말에 “저는 그런 축하를 받을만한 인물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박사를 졸업할 때 즈음엔 아무리 나이 많고 지방대를 나온 여자이지만 논문 실적 하나로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하지만 이후 원서를 넣는 국내 대학마다 모두 떨어지면서 세상의 선입견을 실감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3년전부터 HCR에 오르면서 주위에서 ‘잘 될거야’라고 응원을 많이 해줬는데, 그게 더 가슴 아팠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는 논문만으로 조 박사 인정 

한국과 달리 외국에서는 조 박사를 인정했다. 그는 지난해 중국 스촨성(四川省)의 과학기술대학에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하지만 중국에 상주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대만 의학대학원에 비전임 학술연구원으로도 임용됐다. 이주를 하지 않고 한국과 대만을 때때로 오가면서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조 박사는“중국은 나이도 학벌도 결혼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로지 논문 성과만 보고 나를 뽑았다”며“그래도 가족이 있는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싶은데 나이만 먹어가고 기회가 오질 않는다”고 한탄했다.

이향숙 대한수학회장(이화여대 교수)은“우리 사회엔 학계에 복귀한 경력단절 여성 과학기술인들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팽배해 있다”며 “이들의 재도전과 노력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고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기관별 HCR로는 서울대·UNIST가 공동 1위

한편 27일 발표한 2018 한국 HCR 중 기관별로는 서울대가 8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울산과학기술원(UNIST, 6명)이었다. 학자 한 명이 2~3개의 분야에서 HCR에 오른 것을 포함하면 서울대와 UNIST가 9명으로 공동 1위에 올랐다. UNIST에서는 로드니 루오프 교수가 화학과 재료과학ㆍ물리학 세 분야에서, 조재필 교수가 화학과 재료과학 두 분야에서 HCR에 올랐다.

세계적으로는 미국이 2639명으로, HCR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영국(546명), 중국(482명), 독일(356명) 순이었다. 기관별로는 미국 하버드대학이 186명으로 가장 많고 미국 국립보건원(NIH) 148명, 미국 스탠퍼드대학 100명, 중국과학원 91명,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76명 등이다.

진주=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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