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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중·일 연합군’이 몰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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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최악의 위험은 뭘까.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의 유명한 분석에 따르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Unknown Unknown)’ 리스크다. 알려진 위기는 대비할 수 있지만, 모르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양국 기업 손잡고 제3국 사업 진출 #두바이 8000억짜리 공사도 따내 #한·일 관계 개선 위한 묘안 찾아야

경제난과 북한 문제에 얼이 빠진 요즘 한국이 딱 그 꼴이다. 나라 밖에서 위기 상황이 펼쳐져도 도통 깜깜이다. 바로 ‘중·일 연합’이란 전례 없는 현상으로 한 달 전 그 실체를 드러냈다.

강제징용 판결이 내려지기 5일 전인 지난달 25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12년 취임 후 처음으로 중국을 찾았다. 그러곤 다음날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회담에서 서로 돕기로 합의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해외 방문이다.

하지만 이번 방중엔 회심의 일정이 숨어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 아베는 동행한 일본 기업인 200여 명과 특별한 회의에 참석했다. 이름하여 ‘1차 중·일 제3국시장 협력포럼’. 두 나라가 손잡고 세계 각지의 사업에 함께 진출하자는 얘기다. 눈길을 끄는 건 양측이 이미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는 대목이다. 이날 소개된 성공 사례는 태양광 사업으로서는 사상 최대라는 8000억원 규모의 두바이 발전소 프로젝트. 일본 종합상사 마루베니와 중국의 신생업체 진코로 이뤄진 컨소시엄은 쟁쟁한 구미 업체들을 누르고 입찰을 땄다. 한국에선 한전과 한화큐셀이 팀을 짜 참가했지만 꼴찌인 6위에 그치는 수모를 겪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중·일이 세계 50여 곳에서 합작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한국의 건설·신생에너지 업체들은 이제 ‘중·일 연합군’이라는 공룡과 싸우게 됐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일본에선 한국 기업과의 협력 바람이 분 적이 있다. 한국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면서 훌쩍 큰 한국 업체들과 손잡고 제3국에 진출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란 인식이 퍼졌다. 인도네시아 가스사업 등 50건 이상의 한·일 협력사업이 성공한 것도 이런 흐름 덕분이었다.

하지만 요즘 일본 분위기는 싹 변했다. 한·일 합작은 쑥 들어가고 온통 중·일 협력 이야기뿐이다. 거대한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 일본 자본이 필요한 중국과 트럼프의 보호주의에 몰려 새 시장이 절실해진 일본 간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 덕에 일본 정부는 올 초, 그동안 진행해온 아프리카 인프라 개발에 중국의 동참을 요청해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 중국 각 성(省)이 벌이는 환경사업에도 일본 회사들이 뛰어들고 있다. 영토 분쟁과 과거사 문제 등으로 늘 원수로 남을 것 같던 중국과 일본이었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선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법. 지금 추세라면 중·일 연합군이 막강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이런 위기는 한국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지난해 위안부 합의를 깨는 바람에 한·일 간 감정은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지난달 말 강제징용 판결에 이어 21일 발표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은 비틀거리는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게다가 오는 29일로 잡힌 미쓰비시중공업의 강제징용 및 근로정신대 소송에서 똑같은 취지의 판결이 이뤄지면 직접 투자는 물론, 한·일 간의 제3국 합작사업도 확 줄 게 틀림없다.

국내 일본 기업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격렬하지 않자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예측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눈 밖에서 이뤄지는 중·일 간 밀착이 바로 진짜 후유증이다. 위안부 및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일본도 납득할 절충안을 하루빨리 찾아내야 하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