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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13명 서명에 시간 허비 90세 할머니 인공호흡 고통 사라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한 암환자가 혈액투석기 등의 연명의료 장치를 달고 있다. [중앙포토]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한 암환자가 혈액투석기 등의 연명의료 장치를 달고 있다. [중앙포토]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지만 생전에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알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상태에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면 연명의료를 시작하지 않거나 중단할지 결정하기 쉽지 않다. 2월 시행한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가족 전원이 연명의료(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투여) 중단에 합의하면 가능하도록 길을 터면서 존엄사를 합법화했다.

개정 연명의료법 내년 3월 시행 #존엄사 요건 '가족 전원→1촌' #배우자·자녀 없으면 손자가 대신 #수혈·승압제·에크모도 중단 가능

하지만 '가족 전원' 조항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국회가 나서 가족의 범위를 환자의 부모나 자녀(직계 1촌 이내)로 제한하도록 법을 고쳤다. 23일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3월 28일 시행한다. 바른미래당 최도자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률이다.

가족 범위를 좁힌 이유는 환자가 고령일수록 자녀가 많고, 손자·손녀까지 찾아서 일일이 서명받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90세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해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얼마 안 돼 뇌사상태에 빠졌다. 의료진이 가족에게 연명의료 중단을 권했다. 자녀 6명과 손자녀 11명은 서명했지만 손자 2명이 문제였다. 1명은 수감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연락이 두절됐다. 할머니는 일주일 넘게 고통을 받고 세상을 떴다.<중앙일보 10월 11일자 4면>

촌각을 다투는데, 손자녀를 찾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서 가족임을 확인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그 새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있다. 이런 문제점이 계속 제기되자 국회에서 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개정법에 따라 환자 가족 중 배우자와 자녀가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한다. 이들이 없으면 2촌 이내의 직계 존속·비속(조부모·손자녀)이 나서고, 이마저 없으면 환자의 형제·자매가 동의서에 서명하게 된다.

이번 개정으로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줄이는 길이 넓어지긴 했지만 환자의 자기 결정 권한이 더 침해받게 됐다. 마지막을 어떻게 맞을지 선택하는 권한은 오로지 본인에게 있다는 반론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2월 이후 이달 3일까지 2만4331명이 연명의료 중단을 시행했고, 이 중 환자 가족 전원 합의가 8833명(36.3%)로 가장 많고 가족 2명이 부모의 생각을 대신 진술한 경우가 30.6%다. 3분의 2가 가족이 결정했다. 환자가 서명하는 연명의료계획서·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39.4%에 지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는 이번에 중단 가능한 연명의료 행위를 3개 추가하기로 했다. 지금은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투여 등 4개가 대상이다. 연명의료법 시행령을 고쳐 수혈·승압제(혈압 높이는 약)·에크모(체외생명유지술) 등 3개를 추가한다. 복지부는 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 심의가 끝나는 대로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뒤 내년 3월 시행할 방침이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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