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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책방 어벤져스 뭉쳤다 … 책방이 살면 지역도 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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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호 12면

[박신홍의 人사이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소속 책방지기와 가족들이 충북 괴산군 숲속작은책방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병록·백창화씨 부부, 김현정씨와 딸 이유선·주현양, 이소영·이철재·이진·이용주씨. 신인섭 기자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소속 책방지기와 가족들이 충북 괴산군 숲속작은책방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병록·백창화씨 부부, 김현정씨와 딸 이유선·주현양, 이소영·이철재·이진·이용주씨. 신인섭 기자

예전엔 골목 어귀마다 책방이 있었다. 책을 접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나이 지긋한 주인이 반겨주던 그곳은 동네 도서관이자 지식의 보고였다. 대학가에서도 인문학 서점이 만남과 토론의 장소로 젊은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이 책시장을 휩쓸면서 이들 책방은 급격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마치 대형마트에 밀려 동네 수퍼마켓들이 사라진 것처럼. 어느새 집 주변엔 참고서와 문구류를 파는 입시형 서점만 남았다.

동네책방 #치솟는 임대료에 3년째 폐업 일쑤 #카페 겸업, 영어 강좌로 생계 유지 #‘책방넷’ 결성 #전국 60여 곳 동네책방 연대 모임 #생존 노하우 공유, 시행착오 줄여 #차별화 전략 #읽을 만한 책 정해주는 ‘북 큐레이션’ #지역주민들 대화·소통 사랑방 역할 #도서 정책 #공공도서관은 지역 책방서 책 사고 #유통 구조, 정가제 차등 개선되길

그랬던 동네책방이 최근 3~4년 새 하나둘 다시 생겨나고 있다. 참고서는 팔지 않고 대신 주인장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색깔과 아이템으로 무장한, 말 그대로 책을 파는 책방이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300여 곳에 속속 들어섰다. 그중 60여 곳은 지난달 22일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책방넷)’라는 연대 모임도 처음 결성했다. 이들은 왜 실패한 업종으로 판명난 동네책방의 문을 다시 열기로 한 걸까. 책이 팔리긴 할까. 이들은 과연 몇 년을 버틸 수 있을까. 이들에게 희망이란 존재하는 걸까. 궁금증을 한아름 안고 책방지기들을 만나러 나섰다.

책방은 구경만, 구매는 인터넷·대형서점서

충북 괴산군 숲속작은책방 입구. 신인섭 기자

충북 괴산군 숲속작은책방 입구. 신인섭 기자

숲속작은책방은 충북 괴산군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14년 문을 연 뒤 전국의 책 애호가들이 가보고 싶은 책방 0순위로 떠오른 곳, 차마 엄두를 못 내던 예비 책방지기들에게 도전할 용기를 불어넣어준 이곳에 책방넷 회원 일곱 명이 모여 앉았다. 책방 주인 백창화·김병록씨 부부가 과천 타샤의책방 김현정씨, 수원 마그앤그래 이소영씨, 대전 우분투북스 이용주씨, 제주 그림책방 노란우산 이진씨, 서울 책인감 이철재씨 등을 반갑게 맞았다.

소문대로 책방은 무척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집 전체가 책 읽는 공간인 ‘가정식 서점’인 데다 하룻밤 북스테이 프로그램도 선보여 인기가 높다. 내비게이션에도 뜨지 않던 산속 깊숙한 곳을 한 해 5000명 넘게 찾는 이유다. 그럼 책은 좀 팔렸을까. 부부는 “가장 큰 현실의 벽은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멀리서 예쁜 책방 구경하러 왔다면서 책은 안 사고 사진만 찍고 돌아가더라. 그들에게 이곳은 관광명소이자 포토존일 뿐이었다. ‘여기서 살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매물 나온 집은 없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적잖았다. 그나마 ‘책 한 권은 사세요’ 캠페인을 벌였더니 최근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책을 사더라도 오늘날 ‘스마트한’ 소비자들에게 동네책방은 책의 실체를 확인하는 곳일 뿐, 구매처는 인터넷과 대형서점이다. 효율과 정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최저가 명패가 붙지 않은 구매는 설 자리가 없다. ‘책을 왜 돈 내고 사서 봐?’라는 풍토와 ‘인터넷이 싸고 편한데 왜 굳이 책방에서…’라는 인식은 동네책방이 넘어야 할 두 개의 숙명적 관문이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잘 알고 도전한 거라고 했다. 이용주씨도 “요즘 대한민국에 쉬운 자영업이 어디 있겠나. 내가 좋아하는 책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 아니겠나. 최소 5년은 어떻게든 버텨볼 참”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임대료는 또 다른 현실의 벽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동네책방도 예외가 아니다. 1년은 적자를 감수하고 2년째는 근근이 버티다 3년째는 임대료를 감당 못해 폐업하거나 외곽으로 옮겨야 하는 게 현실이다. 나름 잘 나간다던 동네책방들이 최근 잇따라 문을 닫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철재씨는 “고객을 지속적으로 유치하려면 일정 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2년 넘겨 재계약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다 보니 동네책방 중에는 생계를 위해 카페를 겸하는 곳이 많다. 하지만 이 또한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김현정씨는 “카페와 책방 손님을 함께 챙기다 보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기 십상이었다. 과천시내의 모든 카페가 꽉 들어차도 우리는 늘 비어 있곤 했다”며 “결국 본질에 충실한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김씨는 자녀를 키우며 쌓은 경험을 토대로 학부모 눈높이에 맞는 각종 강좌를 개발해 지역주민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쪽으로 활로를 찾았다.

이진씨도 특화된 전문성으로 독자들의 발길을 모았다. “제주에만 70곳 넘게 들어설 정도로 동네책방 바람이 세게 불었다. 뭔가 차별화된 콘텐트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겠다 싶었다.” 고심 끝에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승부를 걸었고, 지금은 서울의 유명 작가들이 흔쾌히 내려가 강의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소영씨도 “자수부터 영어 강좌까지 사람을 모을 수 있겠다 싶은 건 다 해봤지만 결론은 책에 집중하는 것만이 살 길이란 거였다”고 했다.

하룻밤 북스테이를 할 수 있는 2층 다락방. 신인섭 기자

하룻밤 북스테이를 할 수 있는 2층 다락방. 신인섭 기자

책에 집중하는 것, 그 해답의 단초를 이들은 ‘북 큐레이션’에서 찾았다. “매일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대체 어떤 책을 봐야 할지 감별할 길이 없지 않나. 대형 출판사 광고만 보고 샀다가 속았다는 느낌이 든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이런 독자들에게 동네책방이 엄선한 책을 추천해 주는 거다.” 꼭 권하고 싶은 책, 널리 읽히면 좋겠는 책, 작은 출판사의 좋은 책이지만 마케팅 기회가 적어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책을 책방지기의 이름을 걸고 건넸더니 만족도가 예상을 뛰어넘더라는 거였다.

이소영씨는 이를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의 최저선을 정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렇게 고른 책으로 신간 설명회를 열며 단골 고객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용주씨가 말을 보탰다. “손님들이 ‘대형서점에선 안 보이던 책이 여기 있네요. 이 책 교보문고에서도 파나요’라며 놀라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 공간의 한계 속에서도 독자들이 찾을 만한 책을 선별해 놓는 것, 이게 동네책방의 경쟁력이자 힘이다 싶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동네책방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힘들었다. 동네 주민들이 인터넷 대신 집 앞 책방을 찾을 또 다른 이유가 필요했다. 김병록씨는 대화와 소통이란 화두를 꺼냈다. “40~50대 고객 중에 ‘요즘 많이 외로우니 마음 따뜻해지는 책 좀 추천해 달라’는 요구가 부쩍 늘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사회가 이 정도인가 싶어 깜짝 놀라곤 한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과 공간이 필요했다’며 이곳을 찾는 경우도 적잖다.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소통하는 게 인터넷·대형서점에선 불가능하지 않겠나. 단골들이 동네책방을 찾는 것도 책을 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나눈 수많은 이야기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유럽선 책방이 지역 문화 모세혈관 역할

이소영씨가 말을 이었다. “책방에서 5분 거리에 큰 공공도서관이 두 개나 있다. 그런 공간을 두고도 동네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다. 얘길 나눠 보니 사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손님이 의외로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나만의 공간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랄까.” 이철재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책방이 동네 사랑방으로 자리매김되면 좋겠다. 책을 파는 곳을 넘어 동네 주민들이 스스럼없이 모여드는 곳, 사람과 이야기와 추억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 됐으면 싶다.”

백창화씨는 유럽 사례를 소개했다. “유럽 나라들을 보니 우리처럼 99% 독과점이 아니었다. 독립서점들이 전체 도서시장 매출의 20%를 차지하며 지역 문화의 모세혈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책방이 살면 동네가 살고 지역도 상생한다는 명제는 이미 해외 각국에서 증명되고 있다.”

충북 괴산군 숲속작은책방에 모인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숲속작은책방 김병록·백창화씨 부부, 서울 책인감 이철재씨, 대전 우분투북스 이용주씨, 밑줄 왼쪽부터 수원 마그앤그래 이소영씨, 제주 그림책방 노란우산 이진씨, 과천 타샤의책방 김현정씨와 딸 이유선·주현양. 신인섭 기자

충북 괴산군 숲속작은책방에 모인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 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숲속작은책방 김병록·백창화씨 부부, 서울 책인감 이철재씨, 대전 우분투북스 이용주씨, 밑줄 왼쪽부터 수원 마그앤그래 이소영씨, 제주 그림책방 노란우산 이진씨, 과천 타샤의책방 김현정씨와 딸 이유선·주현양. 신인섭 기자

이제 이들의 시선은 생존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 책방넷 결성이 기폭제가 됐다. 그동안 각자 고군분투하느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작은 책방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뒤 함께 손잡고 나가기로 했다. 동네책방계의 어벤져스가 뭉친 셈이다. 이철재씨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위로받을 수 있는 동료들이 생겼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하자 이진씨가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있나 싶었는데 바로 곁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함께 갈 사람들이 생겼다고.”

세부적인 계획도 세워 놓았다. 동네책방 워크숍을 통해 생존 노하우 공유하기, 창업 서점학교를 열어 예비 책방지기들의 시행착오 줄여주기, 출판·유통회사와의 공동 협상으로 상생 도모하기, 정부 기관과 적극적인 정책 협의에 나서기 등이다. 이날 만남에서도 여러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동네책방들이 올해의 좋은 책과 노벨상의 이그노벨상처럼 올해 가장 속았던 책을 자체 선정하자는 제안은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백창화씨는 “특히 유통 구조와 도서정가제 개선 문제는 동네책방은 물론 도서 생태계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넷서점은 10%에 할인에 5% 마일리지, 여기에 무료 배송까지 곁들인다. 게다가 도매상은 동네책방엔 1.5배 비싸게 책을 공급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차등이 불가피하다 해도 이렇게 격차가 크면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정부의 정책 의지가 중요하다. 차등이 조금만 줄어도 동네책방엔 큰 힘이 될 거다.”

김현정씨도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동네책방은 살아남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프랑스나 일본처럼 공공도서관은 그 지역 동네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도록 하고, 공공시설도 책방 등 문화예술 공간에 우선 임대하도록 하는 정책이 시급하다”면서다. 맞다. 이런 게 진정한 ‘공정경제’의 실현이다. 현장의 작은 목소리들을 담아내 실질적인 정책 해법을 제시하는 것, 이런 게 진짜 사람 중심의 정치일 터다.

그래도 2시간 넘은 인터뷰는 희망으로 마무리됐다. “이곳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겨울왕국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꿈을 꾼다. 동네책방에서 책이 팔리는 꿈, 책으로 주민과 소통하는 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간 봄이 오지 않겠나.”

박신홍 정치팀장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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