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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건성 담갔는데… 그렇게 먹고싶은 '엄마표' 김치라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63)

아들 내외가 잠시 다녀가란다. 가까운 곳도 아닌 호주인데 마치 이웃집 사는 듯이 부른다. 긴 비행시간이 피곤하고 싫어서 요리조리 피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 올해는 회갑의 찬스를 써서 왕복 프리미엄으로 끊었어요. 호호. 어머님 편하게 모시려고 우리 부부 열심히 일했답니다. 편히 오세요.”

순간 가슴이 저리며 울컥 눈물이 나왔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도 대우받으니 좋다. 2주나 되는 시간을 보내려면 여행 다니면서도 큰돈이 나갈 텐데 하며 걱정하고 있으려니 며느리가 선 답을 해준다.

엄마표 김치의 대표인 딸 사돈네의 김장대전. 해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외치시면서도 해마다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해서 싸 보낸다. 사돈 김치도 챙겨주시는 부처님 같은 사돈댁이다. [사진 송미옥]

엄마표 김치의 대표인 딸 사돈네의 김장대전. 해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외치시면서도 해마다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해서 싸 보낸다. 사돈 김치도 챙겨주시는 부처님 같은 사돈댁이다. [사진 송미옥]

“어머니, 2주를 어찌 지내실지 걱정하시죠? 그건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여행도 다니지만 중간에 ‘엄마 김치 만들기’ 시간도 있답니다. 호호. 남편이 엄마 김치가 먹고 싶다며 며칠 전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려서요. 오신 김에 엄마표 김장김치도 담가주고 가셔야 해요.”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결혼생활 40년이 다 되도록 김치를 담았어도 ‘참 맛있었다’고 자부하는 해는 몇 해가 안 되었다. 닥치는 대로 담가 먹은 김치가 엄마표 김치라고 할 만한 맛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벌써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다. 그 옛날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니 시댁의 형편은 파산 직전의 상태였다. 그해 겨울 층층시하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의 겨울은 혹독하리만큼 추웠다. 아무리 가난해도 기본 반찬인 김장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라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를 수확했다. 김장배추도 집안의 가난을 알았는가 어쩌면 그리도 어설픈 모양인지 속이 찬 배추가 거의 없었다.

겨울날 짚으로 동여매도 살까 말까인데 그 추위에 그렇게 시퍼런 잎으로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속은 차지 않은 요즘 말로 납작 배추였다. 그런데 문제는 양념이었다. 소금이야 기본 재료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김치 맛을 내는 것은 젓갈과 고춧가루 그 외 양념의 조합이 아니던가!

그 당시 나는 김치를 직접 해보지는 않았지만, 친정엄마가 만드는 과정과 그 맛은 기억했다. 통 큰 배추를 반으로 잘라 다시 칼집을 내어 소금물에 푹 절이고 다음 날 씻어 물기를 뺀 후 찹쌀로 쑨 풀죽에 맑은 젓갈과 고춧가루 그리고 온갖 양념과 채소를 썰어 넣고 휘저어 버무리면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엄마가 김치를 담글 때면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양념을 푹푹 찍어 먹다가 혼나기도 했다. 푹 절인 배춧잎에 싼 양념 묻힌 겉절이를 입에 넣어주면 맛있어서 마구 받아먹다가 밤새 물을 들이켜고 화장실을 쫓아다녀도 좋았다.

딸네 집 냉장고에 빈 통으로 들어있던 김치통을 들고 와서 세척해 보냈다. 빈 통을 들고 가 꽉꽉 채워 오는 기쁨을 부모님이 떠나고 나면 느낄는지.... [사진 송미옥]

딸네 집 냉장고에 빈 통으로 들어있던 김치통을 들고 와서 세척해 보냈다. 빈 통을 들고 가 꽉꽉 채워 오는 기쁨을 부모님이 떠나고 나면 느낄는지.... [사진 송미옥]

폭 삭은 젓갈은 인생의 맛이다. 부산발 완행열차가 삼성역에 도착할 즈음 동네 사람들은 집 앞을 서성거렸다. 며칠에 한 번씩 들르는 싱싱한 생선을 머리에 인 부산 아줌마는 봄이면 생멸치가 든 상자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마을을 돌며 장사를 하는데 집집이 통 멸치를 사서 젓갈을 담았다.

우리 집 멸치젓갈은 어떠한 레시피도 없이 순전히 시할머니의 손대중으로 만들어졌다. 소금 하나로 바람과 태양을 시간에 버무려 넣고 인고의 세월을 넣어 뚜껑을 닫아두면 속이 다 삭아 곧 스스로 녹아버릴 상태였지만 뚜껑을 열면 그 모습 그대로 자태를 보여주었다. 재료는 소금뿐이지만 삭았을 때 맛을 보면 그 감칠맛은 집집이 다 달라 그 집의 역사가 되고 삶의 양념이 되었다.

시할머니는 쿰쿰하고 진득한 그것을 생채로 걸려 양념에 섞으셨다. 먹음직스럽지도 않은 양념이었다. 그 많은 배추에 허여멀건 한 양념으로 버무리는 그해의 이상한 김장김치는 내 인생에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시간이었다. 배고픈 가족들은 그렇게 담근 김치 한 조각으로 고봉밥을 먹었다.

빚쟁이에 시달리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모습은 초연하고 꿋꿋해서 그렇게라도 고봉밥을 먹는 자식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사각거리고 아삭해 말로 표현이 안 되는, 배추의 맨몸으로만 맛을 내던 그 김치의 맛을 내보려고 오랫동안 통이 안 찬 배추를 찾아 김치를 담가 보기도 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맛으로 기억하는 엄마표 김치일까? 그때그때 건성건성 만들었던 김치를 아이들이 엄마표 김치라고 불러주니 조금 더 정성스러운 손맛으로 만들어 줄 걸 하며 반성도 해본다.

이 글을 쓰는데 딸아이가 통배추 한 포기를 달랑달랑 들고 들어온다. “머꼬?” “엄마, 둘째 유치원에서 김장김치 담그는 행사를 하는데 배추 한 포기 절여서 갖고 가는 거래. 내가 김치를 한 번도 안 해봐서 어찌하는지 모르잖아. 엄마가 해줘. 호호” 결혼한 지 10년이 된 딸아이의 말에 등짝을 한 대 치며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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