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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경찰청·한전… 스타트업 아이디어 훔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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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창조경제 하랬더니 모방경제 했었나 

미국의 유명 펀드사 대표는 “비용은 터무니없이 비싸면서 최악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바로 정부”라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산업인 각국 정부들이 최악의 품질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규제를 통해 민간기업을 통제하는 정부야말로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얘기다. 우리 정부는 어떨까. 스타트업계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혁신기업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거나 도용하는 사례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정부가 강조했던 창조나 혁신은 벤처업계의 모방경제로 이어지곤 했던 셈이다. 정부와 산하기관들이 어떻게 민간기업의 기술을 베끼고 있고, 그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금감원 유사사업으로 60억 손해본 #주소일괄 변경 서비스 업체 하소연 #경찰청, 한전 등 베끼기 의혹 #공공데이터법 따라 60개 사업 폐지 #기술 약탈로 실적내려는 구태 여전 #국가기관 엄격한 법, 제도 적용해야

짚코드가 개발해 운영 중인 주소 일괄변경 서비스. [중앙포토]

짚코드가 개발해 운영 중인 주소 일괄변경 서비스. [중앙포토]

스타트업체인 ㈜짚코드의 서울 관악구 봉천역 인근 사무실 곳곳은 자리가 비어있었다. 금감원이 이 업체의 사업 아이템과 유사한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13명의 직원은 6명으로 줄었다. 이 회사 나종민 대표는 “금감원이 주소 일괄 변경 사업을 도용한 서비스를 하면서 매출액이 크게 줄어드는 바람에 일부 직원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때 각 부처마다 창조경제 실적을 요구하는 압박이 거세지자 금감원이 금융개혁을 명분으로 유사한 서비스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다. 이후 나 대표와 회사 관계자들은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의회 등에 진정을 넣었고, 지난달에는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정치권도 금감원이 사실상 이 업체의 사업을 베낀 것으로 판단, 시민단체와 법률단체의 자문을 얻어 관련법을 개정키로 했다.

짚코드는 1999년 20여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은행, 보험, 카드 등 여러기관에 등록된 주소를 한 번에 바꿔주는 웹서비스를 시작했다. 서비스 사용자들은 “주소를 무료로 일괄 교체할 수 있어 좋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기업체들은 “우편물 반송률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KT 등의 기업이 참여하고, 행정안전부와 우정사업본부도 협업하면서 2014년엔 10억원의 매출 성과를 올렸다. 입소문을 타고 사업 아이템이 좋은 평판을 받자 2015년 금감원이 유사 서비스를 시작했다. 금감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금융회사들은 짚코드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금융감독 기관이 하는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짚코드의 매출액은 줄기 시작했고, 금감원 사업은 공공데이터법 위반 논란을 불러왔다. 관련법은 공공 데이터를 이용해 민간기업이 사업을 먼저 하고 있을 때 공공기관이 동일한 서비스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가 지하철 노선안내 서비스를 중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달 국회 정무위 소속 추혜선 의원이 금감원을 상대로 한 주장의 일부를 들어보자. “금감원이 2015년 ‘국민체감 20대 금융관행 개혁’ 과제로 금융주소 일괄변경 아이템을 도입할 때 민간기업에 유사한 사업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금융주소 한번에’ 서비스를 강행해 중소벤처기업을 고사위기에 빠트렸다.” 벤처업체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아이디어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물론 금감원은 “관련 서비스가 특정 회사의 고유한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2016년 4월 7일부터 공공데이터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공공데이터전략위원회는 실태조사를 통해 정부기관이 운용하던 60개 서비스를 중복 및 유사사업으로 확정해 폐지를 유도했었다.

금감원이 모방했다는 논란을 빚고 있는 또 다른 서비스. 짚코드는 청와대에 진정을 내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다. [중앙포토]

금감원이 모방했다는 논란을 빚고 있는 또 다른 서비스. 짚코드는 청와대에 진정을 내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다. [중앙포토]

금감원만 유독 이 사업에 집착해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금감원은 짚코드의 항의가 계속되는 와중에 지난해 1월 사업권을 한국신용정보원에게 넘겼다. 한국신용정보원에는 198개 금융사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이들로부터 모두 386억원의 운영비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한국신용정보원의 주소변경 서비스가 채권추심에 악용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변경된 개인 회원들의 공공 정보가 제2, 제3의 금융회사는 물론 채권추심업체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금감원이 직원들에 대한 자리보전용으로 한국신용정보원의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금감원과 짚코드와의 분쟁은 공공데이터의 개념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관련법에서 공공데이터는 데이터베이스, 전자화된 파일 등 공공기관이 법령에서 정하는 목적을 위해 생성 또는 취득해 관리하고 있는 광(光) 또는 전자적 방식으로 처리된 자료나 정보를 말한다. 이에 근거해 금감원은 개인 주소는 개인 정보의 일종으로 공공데이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행정안전부는 주소도 공공데이터에 포함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국가기관이 건물 등이 있는 특정 위치를 객관적이며 일괄적으로 통일해 지칭될 수 있도록 공적으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재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짚코드가 금감원 사업이 공공데이터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사 측은 “정보나 공공기관이 중소벤처업체의 사업 아이템을 베끼는 것이야말로 일자리 적폐”라며 “이번 분쟁으로 인한 피해액만도 개발비와 시스템 유지비 등 60여억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기관의 서비스 침해는 민간기업들을 파산 위기로 몰아넣고, 산업 생태계마저 교란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더치트란 회사가 사기 피해자들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앱을 만들자 경찰청은 사이버 범죄 예방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겠다며 사이버 캅을 만들어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한국전력은 한 스타트업체의 전기요금 지로 납부 서비스 아이디어를 도용했고, 기상청은 모바일 날씨 앱을, 국토부는 공간정보 서비스인 브이월드를 만들었다가 폐지 권고를 받았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정부기관에 의한 민간 사업 영역 침해사례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왜 그럴까. 권위주의적 정부의 습관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증강현실(AR) 사업을 하고 있는 한 업체 대표의 얘기다. “사업 초기 정부 부처를 돌아다니며 설명을 할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규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업이 안정화 시기에 접어들자 민관 협력을 이유로 간섭과 참견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공공연히 합작형태의 프로젝트를 요구했다.” 민간기업의 실적을 이용해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혁신 등의 평가 점수로 활용하거나 퇴직 후 자리보전용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차례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많은 사상가들이 현대 국가의 경쟁력과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불가피한 폭력을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민간기업의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훔치거나 베끼는 행위는 잡범이나 다름없다. 민간영역에 대한 약탈적이고 배타적인 국가기관의 행위에 대해선 엄격한 법과 제도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 선의를 갖고 신청한 주소 일괄 변경 신청이 채권추심업체에 넘어가서야 되겠는가.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