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비디오 아트 선구자 다국적 입맛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멋있게 그리고 맛있게 산 사람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었다. 사진은 1992년 가을 경주를 방문했던 생전의 백남준 모습.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811/17/b85b0615-b529-490d-b366-3c895322087d.jpg)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멋있게 그리고 맛있게 산 사람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었다. 사진은 1992년 가을 경주를 방문했던 생전의 백남준 모습. [중앙포토]
“맛있어, 맛있어.”
태창방직 대표 부친 재산 국고 몰수 #60~70년대 뉴욕서 악전고투하며 #전인미답 비디오 아트 세계 개척 #84년 1월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한국 비롯한 전 세계에 이름 알려 #작품에 돈 쏟아 유명해져도 늘 곤궁 #볶음우동·샌드위치·막걸리 즐겨
백남준(1932~2006)이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맛있어”였다. 2006년 1월 29일은 음력 설날이었다. 부인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는 백남준이 좋아하는 장어덮밥을 했다. 백남준은 일본어로 “맛있어, 맛있어(오이시이 오이시이)”라고 소리 내며 좋아했고 잠시 후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스르르 눈을 감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백남준은 엄청나게 부유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가난했다. 그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창신동으로 이사했으며 거기서 자랐다. 부친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인 태창방직의 대표 백낙승이었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3번 출구를 나오면 백남준기념관이 있다. 예전에 큰대문집이라 불리던 대저택의 일부다. 대저택은 필지가 여럿으로 나뉘어 그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는데 그나마 골목 한 귀퉁이의 건물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 건물은 식당이었다가 지난해 백남준기념관으로 변모하여 개관했다.
미국 언론 “비디오 아트의 조지 워싱턴”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이 뉴욕-파리를 위성으로 연결해 생중계한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상영 중인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사진 백남준아트센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811/17/ef973748-7825-49ee-b508-b02815486d1d.jpg)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이 뉴욕-파리를 위성으로 연결해 생중계한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상영 중인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사진 백남준아트센트]
백남준은 이곳 창신동 집에서 경기중학교(현재의 중·고교)까지 다녔다. 1949년 부친의 통역 자격으로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는 홍콩의 로이덴 스쿨을 다녔으며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으로 가서 가마쿠라에 정착했다. 도쿄대 미학과에서 미학, 음악, 예술사학을 공부했다. 졸업논문은 작곡가 ‘쇤베르크에 관한 연구’였다.
56년 독일로 가서 음악을 공부하면서 전위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64년 일본으로 돌아와서 엔지니어 아베 슈야를 만나 K456이란 로봇을 제작한 다음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태창방직의 재산이 국고에 몰수되던 63년까지 백남준에게는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다. 독일에서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그 이후부터는 생활이 힘들었다. 악전고투하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라는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75년 주간 뉴요커는 백남준에 관한 대대적인 기사를 실으면서 "비디오 아트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추켜세웠다. 미국 언론이 백남준을 새로운 미술인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명명한 것이다.
뉴욕시간으로 84년 1월 1일 정오(한국시간으로는 1월 2일 새벽 2시), 뉴욕과 파리를 위성으로 연결한 퍼포먼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방영되었다. 한국의 시청자들도 이 퍼포먼스를 실시간으로 볼 수가 있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예술가들에게도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 위성방송 이전까지 백남준의 이름이나마 알고 있는 국내의 예술가는 소수였다.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예술가는 극소수였다. 이 한 방으로 백남준은 세계 도처에 이름을 크게 알렸다.
백남준은 유명했지만 곤궁했다. 그의 어머니는 백남준에게 돈은 물 쓰듯 하는 거라고 가르쳤다. 백남준은 작품을 위해선 정말로 돈을 물 쓰듯 했다. 쉬지 않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골몰하던 그였기에 늘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뉴욕 소호가 삶의 본거지였다. 80년대 초반에도 뉴욕에는 이미 한국인 미술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은 기이한 행색의 백남준을 외면했다. 첨단예술인 비디오 아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백남준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방영 이후 국내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백남준에 대해서 여전히 몰이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를 비난하고 배격하는 미술인들도 많았다.
![백남준 타계 1주기였던 2007년 1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남편의 작품 ‘다다익선’을 감상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811/17/b905a48a-cde2-48cc-a04b-523bf1d7554d.jpg)
백남준 타계 1주기였던 2007년 1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남편의 작품 ‘다다익선’을 감상하고 있다. [중앙포토]
백남준은 젊은 한국인 후배 미술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판화가 김승연은 80년대 초반 뉴욕주립대 뉴팔츠 캠퍼스의 대학원생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백남준을 몇 번 만나 식사를 했다. 그때마다 소호의 자그마한 일식집을 찾았고 메뉴는 소박하게 볶음우동이었다. 볶음우동 위에 가다랑어포를 듬뿍 얹혀 먹는 걸 좋아했다.
식사가 끝나면 벤치에 앉아 젊은 후배 화가에게 “남들은 늦은 나이에 오는 뉴욕을 넌 20대에 왔으니 행운이다. 남들을 흉내 내거나 남들이 이미 했던 작업을 반복해서 할 필요는 없다. 너만의 것을 만들라”는 당부를 했다.
백남준은 거의 매일 참치 샌드위치를 먹었다. 대체로 곤궁했기에 식단이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어쩌다 목돈이 생기면 고급 레스토랑을 찾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만 에너지를 집중했기에 특별히 음식을 가리는 등 미식가 티를 내지 않았다.
일찍 당뇨병이 찾아와 술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술자리에서의 그는 재치가 넘쳤고 유쾌했다. 서울올림픽을 몇 달 앞둔 88년 초여름 백남준과 한국의 대표적인 명사들이 함께하는 술자리가 서울 강남의 어느 한식집에서 있었다. 백남준의 자리는 당연히 최고 상석인 맨 구석 자리였다. 마주한 자리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 L씨가 앉았다.
식당에서 내놓을 수 있는 포도주라곤 마주앙의 화이트와인이 유일할 때였다. 7~8명쯤의 명사들이 건배를 하려는 순간, 문 앞에 앉은 젊은 H의 술잔만이 비어있음을 백남준이 알아차렸다. H는 동석으로 끼일 만한 나이도 신분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의 술잔을 아무도 채워주지 않았던 것. 백남준이 맨 끄트머리에 앉은 H를 향해 좁고 긴 술상 위를 올라타고선 기다시피 하여 다가와서는 H의 잔에다 술을 부었다. 덕분에 엉망이 된 술상자리를 다시 차려야만 했다. 백남준은 차별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자리가 수습되고 건배를 마치자 L의 현란한 언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의 독무대가 너무 길었다. 요약해도 좋을 걸 자신이 읽은 책을 1권부터 15권까지의 내용을 장황하게 다 말하려 하니 여기저기서 유언 무언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눈치 빠른 백남준이 분위기를 감지했다. 과묵 일변도의 백남준이 한마디를 던졌다.
“L형, 혹시 16권을 읽어보셨소? 내가 뉴욕을 막 떠나기 전에 마침 그 양반이 최근에 쓴 16권을 읽었는데, 15권까지 쓴 게 다 거짓말이라고 합디다.”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독서광 백남준의 그 한마디로 L씨의 독무대는 물러나고 백가쟁명의 즐거운 대화가 시작되었다. 백남준 자신의 예술관은 물론이고 L씨의 서울올림픽에 대한 아이디어도 마구 쏟아져 나왔다. 서울올림픽의 부대행사인 위성 아트 ‘랩 어라운드 더 월드’의 실행방안도 그 자리에서 나왔다.
독서광 백남준은 젊은 시절의 독서 이력을 비디오 아트 작품에 재미난 서체로 남겼다. 한국 문인으로는 정지용, 김동리, 소월, 유진오, 김소운, 이광수, 서정주, 노천명 등이 일본 문인으로는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시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다니자키 쥰이치로(谷崎潤一郞 이상 소설가) 미키 기요시(三木淸 철학자)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국 문인으로는 사마천, 두보, 도연명, 양계초 등이 서구문인으로는 카프카, 헤세, 셰익스피어 등을 기록했다.
백남준과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 1972)의 공통점은 둘 다 가마쿠라에 살았고 장어덮밥을 좋아했다는 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골 장어집은 에노덴의 와다즈카역 근처 노포 쓰루야였다. 1층에는 테이블이 두 개밖에 없다. 장어를 손질하여 덮밥이 될 때까지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도쿄대의 부유한 도련님 학생 백남준은 가마쿠라 최고의 고급 장어요릿집인 이 가게를 자주 찾았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미래의 비디오 아트의 거인이 각각 테이블 하나씩을 차지한 채 장어덮밥을 기다리는 기막힌 시간을 상상해 보는 일은 왠지 짜릿하다.
북한산 정릉 등산로 술집 자주 들러
![백남준이 자랐던 서울 창신동에 있는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사진 백남준아트센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1811/17/2f7c8024-901f-442a-86a6-7fb312223219.jpg)
백남준이 자랐던 서울 창신동에 있는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사진 백남준아트센트]
서울에 온 백남준은 교통이 편한 시내의 호텔이 아닌 북한산이 가까운 평창동의 올림피아호텔에 머물렀다. 그 호텔의 객실에서는 창문이 열렸다. 자연풍이 들어와야 몸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두뇌의 사용량이 많아서 그런지 몸의 열을 식히는 냉각 시스템이 잘 돌아가야 했다. 셔츠의 소매도 단추를 풀고 헐렁하게 열어 두었다.
10대에 떠난 서울로 50대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던 서울의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북한산에서 정릉으로 내려오는 등산로의 무허가 술집에서 당뇨병을 잠시 잊은 채 혼자서 조용히 막걸리를 마시는 그의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말년의 10년간은 병마와 싸웠다. 부인이 몸에 좋다며 채식 위주로 식단을 짰다. 그게 불만이었다. 백남준은 한국어, 영어, 일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를 한꺼번에 사용했다. 식성도 마찬가지였다. 가리는 것 없이 지구 위의 모든 음식에 열려 있었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니 서울에 오면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마음껏 찾았다. 하루에 다섯 끼가 될 때도 있었다. 과식이 죽음을 재촉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는 멋있게, 맛있게 산 사람이었다. 맛있어, 맛있어!!! 백남준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해 보낸 감사의 노래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