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평양·함흥 찍고 서울·대전… 냉면 따라 남북 종주한 일본 청년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610호 21면

 박찬일의 음식만행(飮食萬行) 일본 고베의 평양냉면

일본 고베의 79년 묵은 평양냉면 집 원조평양냉면옥. 그 집의 단골 중에 일본인 냉면 마니아 프란시스 야마토가 있다. 남북한을 오가며 냉면을 먹고 다닌 냉면광이다. 사진 왼쪽부터 야마토, 냉면집 주인 김영선 할머니와 아들 장수성씨, 손자 장수기씨. [사진 박찬일]

일본 고베의 79년 묵은 평양냉면 집 원조평양냉면옥. 그 집의 단골 중에 일본인 냉면 마니아 프란시스 야마토가 있다. 남북한을 오가며 냉면을 먹고 다닌 냉면광이다. 사진 왼쪽부터 야마토, 냉면집 주인 김영선 할머니와 아들 장수성씨, 손자 장수기씨. [사진 박찬일]

남북한을 넘나들며 거의 모든 냉면을 먹고 기록해온 일본인을 아시는가. 그럼, 세계 최고(最古) 냉면집 중의 하나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은. 냉면과 일본을 둘러싼 흥미로운 두 가지를 취재하고 돌아왔다. 우선 냉면광 일본인 청년을 소개한다.

냉면광 일본인 프란시스 야마토. 남북한에서 출간된 음식 책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박찬일]

냉면광 일본인 프란시스 야마토. 남북한에서 출간된 음식 책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박찬일]

프란시스 야마토. 1988년생. 웨이브를 넣어 길게 기른 머리, 잘생긴 얼굴. 록 그룹 보컬리스트 같은 풍모다. 그가 대뜸 한국어로 말했다.

30세 냉면 마니아 프란시스 야마토 #2010년부터 남북 오가며 냉면기행 #“만수대 예술창작단 구내식당 최고” #1939년 문 연 고베 원조평양냉면옥 #88세 며느리, 65세 손자와 함께 운영 #평양 출신 지역 교포의 오랜 사랑방

“안녕하십니까. 야마토입니다.”
이런! 그는 한국어에 유창하다. 그를 냉면집에서 만났다. 원조평양냉면옥. 일본 고베(神戸)의 재일교포 집단거주지역 나가타(長田)에 있는, 평양 사람이 대를 이어서 운영하는 진짜 냉면집이다. 그도 이 가게의 단골이다. 자연스레 이 집에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가 문서 한장을 내민다. 최근 냉면에 대해 일본 현지의 ‘오타쿠’들과 세미나를 했다고 한다. 문서 제목이 ‘프란시스 야마토의 조선반도 종단 냉면기행’이다. 한국 냉면광의 꿈이다. 평양과 함흥, 원산과 개성, 그리고 금강산에서 모두 냉면을 먹어보는 일. 그는 일본인이어서 관광객으로 북한 냉면집을 두루 들렀다.

“제일 맛있는 집은 평양 만수대 예술창작단 구내식당입니다. 냉면이 진하고 맛있었어요.”
그는 평양 혈통이다. 증조부가 평양 출생이다. 조부도 물론이다. 패전 후 도쿄(東京)로 이주했다. 그에게는 냉면의 유전자가 있다.

“초등학교 때 도쿄 우에노(上野)의 재일교포 냉면집에서 처음 맛봤어요. 그때부터 신기하게 빠져들었어요. 중학교 때 가족과 함께 서울에 와서 다시 냉면을 먹었죠. 동치미(그는 또렷하게 발음했다)와 면의 조화가 맛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평양 고려호텔의 평양냉면. [사진 프란시스 야마토]

평양 고려호텔의 평양냉면. [사진 프란시스 야마토]

평양 옥류관 평양냉면. [사진 프란시스 야마토]

평양 옥류관 평양냉면. [사진 프란시스 야마토]

함흥 신흥관의 농마국수. [사진 프란시스 야마토]

함흥 신흥관의 농마국수. [사진 프란시스 야마토]

한국의 거의 모든 냉면을 먹었다. 그의 문서에는 ‘거냉, 민짜, 엎어말이’ 같은, 냉면꾼들도 잘 모르는 말이 씌어 있다. 물론 그는 다 알고 있는 용어다. 심지어 한국인은 고급 냉면 축에는 안 끼워주는 인천 화평동 세숫대야냉면(한글로 그대로 쓰여 있다), 부산의 밀면들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걸 다 먹어봤다.

“동치미와 물김치를 쓰는 냉면이 제일 맛있어요. 그게 진짜 냉면 아닌가요? 그래서 남포면옥(서울 다동)을 좋아합니다.”
우래옥은 어떠냐는 말에 “고급이죠. 비싸지만 깊은 맛이 있어요.” 봉피양은 우래옥 출신 주방장 김태원씨가 맛을 내는데, 우래옥과 왜 완전히 다른 맛이냐고 내게 반문했다(봉피양은 김태원씨가 자신의 레시피를 새로 만들어서 우래옥 출신이지만 맛이 다르다).

그는 평양에 자주 갔다. 2010년부터의 일이다. 옥류관, 청류관, 만수대 예술창작단 구내식당, 고려호텔 구내식당 등이다.
“고려호텔 1층에 있는 식당 냉면을 최고로 치는 일본인도 많아요. 지금은 맛이 별로라는 설도 있고.”

평양냉면은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새콤달콤하고 진한 맛이 특징이라고 한다. 면의 색은 특히 다르다. 검은색이 강하다.
“예전에는 흰색을 띠었는데, 점차 검어졌어요. 졸깃해지고.”

그는 함흥에서 물냉면을 먹어봤다. 농마국수라고 그가 발음한다. 함경도는 고구마나 감자로 전분을 내어 졸깃한 면을 얻는다. 한국의 함흥냉면처럼 회를 얹은 비빔냉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도 대세는 물냉면이다. 고명에도 차이가 있다. 가자미나 명태회를 얹어주더란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한다. 그는 냉면광이자 동시에 한국가요광이다. 남인수, 손목인, 왕수복 같은 가수의 노래를 핸드폰에 저장해서 듣고 다닌다. 왕수복이 누군가.

“기생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월북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 인물이었죠.”

냉면은 물론 한국가요사도 무불통지(無不通知)다. 언젠가 관련 책을 쓰고 싶다고 한다. 그와 냉면집 안주인 김영선(88) 할머니가 같이 자리에 앉았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일어와 한국어가 교차하고, 통역이 바쁘게 옮기는 특별한 인터뷰가 됐다.

일본 고베의 냉면집 원조평양냉면옥의 옛날 사진. [사진 박찬일]

일본 고베의 냉면집 원조평양냉면옥의 옛날 사진. [사진 박찬일]

창업주 장모란(張模闌) 할아버지(59년 작고)는 평양에서 냉면 배달일을 한 적이 있다. 고베에 와서 먹고살기 위해 냉면집을 열었으면 했는데, 기술이 없었다. 평양 출신 동포에게 물어물어 독학으로 익혔다. 실패해서 강에 버린 국수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아는 사람이 분통(분창. 국수 내리는 도구)을 어디선가 가져다줘 비로소 면을 제대로 뽑을 수 있었다. 장 할아버지는 식민시기에 돈을 벌러 도일한 케이스다. 당시 고베 지역에는 고무 공장 같은 곳에 징용 온 후 귀국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동포 사회를 이루었고, 냉면집 고객이 됐다. 죄다 평양 출신이었다.

“고향 사람을 만나러 우리 냉면집에 왔어요. 평양 사투리가 왁자지껄했어요.”
김 할머니의 증언이다. 장작과 탄을 때서 면을 말았다. 기름도 쓰다가 이제는 가스다. 편리한 세상인데, 예전의 왁자한 평양 사투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거의 돌아가셨다. 그래도 나가타 지역의 동포가 절반쯤, 일본인이 절반쯤 손님을 구성한다. 한국에도 알려져 짬짬이 꽤 오는 편이다.

할머니의 국적은 ‘조선’이다. 북한이란 뜻이 아니다. 이젠 없어진 옛 조선이다. 조선이 패망했지만, 그 후 생긴 남북한 어느 쪽의 국적을 얻지 않고 그냥 살고 있다. 일본에 사는 동포의 상당수가 이렇게 조선 국적을 고수하고 있다.
“평양시 동대원구역 신양리가 고향이에요. 다시 갈 수 있을지요.”

고베 원조평양냉면옥의 물냉면. [사진 박찬일]

고베 원조평양냉면옥의 물냉면. [사진 박찬일]

고베 원조평양냉면옥의 비빔냉면. [사진 박찬일]

고베 원조평양냉면옥의 비빔냉면. [사진 박찬일]

냉면 메뉴는 조금 특이하다. 특대는 일반 냉면에 갈비구이를 얹어주고, 보통 대짜를 시키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냉면이 나온다. 소짜도 있다. 면은 흰 편이다. 메밀 배합은 3할. 메밀 속살을 갈고 밀가루를 섞는다. 적당히 졸깃하고 산뜻하다. 1인분도 일일이 반죽한다. 면 뽑는 일은 이미 환갑을 넘긴 아들 장수성(65)씨가 한다. 이 집은 일본의 다른 냉면집과 달리 우리 냉면과 상당히 유사하다. 동치미와 고깃국물을 3대 2로 배합하고, 고춧가루를 술술 뿌려낸다. 겨자, 식초를 쳐서 먹으라고 권해준다. 좀 달고 신 맛이 있는데, 이것은 북한과 비슷하다. 깔끔하면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 냉면이다. 상당한 솜씨다.

“숯골원이 물김치, 동치미를 씁니다. 아마 옛날 북한 냉면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 북한 냉면은 면이 달라지고, 고명도 화려해져서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냉면의 원형에 관해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야마토씨가 대전 숯골원냉면집 얘기를 꺼낸다. 얼마 전 작고한 박갑성옹 소식도 알고 있다. 그와 부친이 연배가 비슷하다고 한다. 박갑성옹은 평양고보 재학 중 월남해, 숯골원 냉면을 일군 우리나라 냉면 1세대의 증인이다.

지금도 현역으로 냉면을 만드는 김영선 할머니. 아들이 면을 뽑으면 꾸미는 건 할머니 몫이다. [사진 박찬일]

지금도 현역으로 냉면을 만드는 김영선 할머니. 아들이 면을 뽑으면 꾸미는 건 할머니 몫이다. [사진 박찬일]

“지금은 불고기도 하지만 원래는 냉면만 팔았어요. 시어머니가 불고기를 시작한 건 더 나중이지요. 여름엔 냉면, 겨울엔 만둣국이 메뉴였어요.”

김영선 할머니의 말마따나 지금 일본에서 냉면 파는 집들은 거의 고기가 중심이고 사이드로 냉면을 다룬다. 냉면이 중심이었던 식당, 지금도 냉면만 먹으러 오는 손님이 더 많은 집은 아마도 이곳과 일본 북부 모리오카(盛岡) 일대의 냉면집 정도가 아닐까 한다. 모리오카는 함경도 출신 양용철(작고)씨가 50년대 초반 냉면집을 열면서 도시 전체가 냉면 특구가 된 특별한 경우다. 물론 모리오카도 고기를 같이 판다.

뒤늦게 냉면 한 그릇을 청한다. 시원한 국물에 신맛이 깊게 새겨져 있다. 동치미다. 고명으로 얹은 고기도 정성이 있다. 면을 씹어본다. 적당히 졸깃하고 끊어지는 맛도 있다. 돌아서면 다시 은근히 당기는 맛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온전히 맛을 보면, 더 매력적이다. 이 냉면이 오래도록 이 동네에서 살아남을 것 같았다. 내년에 80주년 기념행사를 할지 모르겠다.

박찬일 chanilpark@naver.com
 글 잘 쓰는 요리사. ‘로칸다 몽로’ ‘광화문 국밥’ 등을 운영하며 음식 관련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 식재료로 서양요리 만드는 붐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