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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선

박근혜보다 많은 임종헌의 수사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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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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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부처 고위공무원인 A씨. 그의 하루는 교도소 담장 위에서 곡예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 정부 들어 적폐 수사에 올인한 검찰의 나열식 범죄행위 일람표에 근거해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렇다.

모든 국민을 수사 대상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 나열식 법 적용 #진영 논리에 따른 직권남용 혐의 남용은 수사 취지 희석시켜

A씨 일과의 상당 부분은 직원들 보고를 받고 이를 바탕으로 회의 자료 등을 재가공하거나 업무 지시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보고 내용이나 회의 자료가 부실할 때다. 과거처럼 질책을 하거나 직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보완을 요구하면 직권남용으로 걸릴 수 있다. 못 본 척하면? 직무유기로 처벌이 가능하다. 내밀한 정보보고나 대외비 작성 등을 지시하는 것도 께름칙해 직접 작성을 하곤 한다.

관례처럼 내려온 회의비나 판공비도 출처를 꼼꼼히 따져야 한다. 현금이나 특활비 성격일 땐 더욱 그렇다. 특가법상 국고손실, 예산 불법 전용과 횡령,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허위공문서 작성, 공전자기록 등 위작 같은 법 조항들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처져 있다. “다른 부처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해왔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무슨 소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별건가.

서울중앙지검이 수사 중인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검찰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수사를 위해 특수부 등에서 30명에 가까운 검사들을 차출해 조사를 벌였다. 구속영장 청구 때 수사 기록이 160권 정도로 한 권당 500쪽 정도임을 감안할 때 8만 쪽에 이르는 분량이다. 구속 기간 동안 수사를 합치면 분량은 훨씬 늘었을 것이다. 이 수사를 위해 80여명의 판사들을 검찰로 불러들여 조사를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6만 쪽짜리 수사기록서보다 더 많다. 각종 재판에 간여한 20여개의 혐의와 심의관 신분의 후배 판사들에게 부당하게 자료 검토나 작성 등을 지시한 40여개의 혐의가 있다. 3억5000만원의 법원 공보관실 예산을 부당 전용한 것은 6개의 혐의가 적용됐다. 각 법원에 공보관실이 없기 때문에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이고, 부당하게 예산을 써 예산 불법전용과 국고손실, 횡령죄에 해당하며, 예산 집행 내역을 허위로 쓰고 이를 컴퓨터로 입력했기 때문에 허위공문서 작성과 공전자기록 등 위작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군중 속의 고독’이란 역설적 표현처럼 장황함 속의 허전함이 느껴진다. “수십 가지의 반찬이 널려 있지만 딱히 먹을 것은 없는 한식당이 연상된다”는 것이 검찰 출신 변호사의 촌평이다. 특수수사의 기본인 환부만 도려내는 절제된 조사라기보다는 저인망식의 정치 보복성 수사라는 지적이 전혀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변호인들은 “234쪽에 이르는 구속영장과 242쪽의 공소장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일탈과 남용을 해부하는 백서나 마찬가지”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정치적, 행정적 책임을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변질시켰다는 얘기다.

이번 수사의 당초 취지는 무엇이었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 때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각급 법원에 걸려 있는 재판을 이용해 정치적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밝히기 위한 것 아니었던가. 최근 판결이 난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노동자 사건과 관련해 임종헌이 청와대와 어떻게 거래를 했고, 이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직권을 남용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20여개의 재판에 간여하고, 심의관들에게 지시해 40여개의 보고서 등을 작성케 한 것이 직권남용이라는 것은 어찌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혹시 검찰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사람들을 투쟁과 대립의 대척점이요, 반드시 없애야 할 절멸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진영논리에 따른 편협한 사고와 수사가 우리 사회를 편협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번 수사를 보며 떠오른다.

조국 수석은 서울대 교수직에 있을 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강의하면서 “선한 권력자도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 같은 무기를 통해 국민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도 그 권력은 통제돼야 하며, 폭정의 방지를 위해 권력은 철저히 분립돼야 한다고 했다. 소수파에 대한 집권층의 관용도 빠트리지 않았다. 검찰의 이번 수사는 어떤 것에 해당할까. 이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던 공정과 정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첨언 하나. 사법 농간과 관련된 의혹을 사고 있는 현직 법관들을 탄핵하자는 주장이 몇몇 판사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극화한 영화 ‘변호사’의 명대사라며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재판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피고인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그 어떤 관행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을 가리는 게 이번 재판의 핵심이 아닙니까.”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