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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하다는 송전선 땅에 묻었는데, 항의시위 왜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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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임종한의 디톡스(11)

한전지중화공사가 한창인 대구시 버스정류장에서 시민들이 미끄러지기 쉬운 빗길에 파헤쳐진 도로를 위험하게 건너고 있는 모습. 곳곳에서 지중화 송전선 설치를 놓고 매주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중앙포토]

한전지중화공사가 한창인 대구시 버스정류장에서 시민들이 미끄러지기 쉬운 빗길에 파헤쳐진 도로를 위험하게 건너고 있는 모습. 곳곳에서 지중화 송전선 설치를 놓고 매주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중앙포토]

도심에 흉물 같은 송전선과 전봇대를 없애고 만든 지중화 송전선. 위험하다는 송전선을 땅에 묻은 까닭에 눈에 보이지 않아 위험하지 않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밀양에서도 송전선 설치를 두고 사회적 갈등이 심했지만, 부천·부평 등 지중화 송전선이 새로 깔리는 지역에선 지중화 송전선 설치를 놓고 매주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송전선에 대해 왜 이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송전선 선로나 변전소 혹은 가전제품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극저주파(ELF, Extreamly Low Frequency) 전자계라고 한다. 극저주파는 바닷물과 같은 양전도체에서도 무선 주파수 통신이 용의한 주파수대역이다.

보통 300Hz 이하를 말한다. 극저주파는 전계와 자계가 분리돼 발생원으로부터 거리 제곱에 반비례해 감소한다. 발생원으로 50m 정도의 이격거리를 유지해야 하나. 이 극저주파의 위해성을 놓고 한전과 지역주민들이 서로 갈등을 빚고 있다.

극저주파 노출, 백혈병 재발 위험과 관련 없어

PC단말기의 전자파를 측정하는 모습. 국제암연구소는 극저주파 노출과 소아 급성 림프아구성 백혈병의 재발 위험과 관련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공표했다. [중앙포토]

PC단말기의 전자파를 측정하는 모습. 국제암연구소는 극저주파 노출과 소아 급성 림프아구성 백혈병의 재발 위험과 관련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공표했다. [중앙포토]

국제암연구소(IARC)는 2012년 12월 21일 극저주파 노출과 소아 급성 림프아구성 백혈병의 재발 위험과 관련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공표했다. IARC의 환경 방사 부문과 덴마크 암연구센터가 주도한 국제공동연구로, 그 결과가 『블러드 캔서 저널』에 게재됐다.

이 연구는 극저주파 노출이 소아 급성 림프아구성 백혈병 재발 위험을 증가시키는지와 그들의 생존확률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조사한 것으로, 캐나다· 덴마크·독일·일본·영국·미국 등에서 조사한 사례를 통합하고, 총 3000명 이상의 백혈병 소아에 대해 진단일부터 최장 10년간을 추적해 생존시간을 분석했다.

그 결과 ELF 노출과 백혈병 재발 위험 또는 전 생존 기간과의 관련은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한전에서는 이 연구결과를 근거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833mG 이하의 전자파는 위해성이 없으며, 현재 지중화 송전선이 깔린 곳은 일반적으로 20mG 이하로 전자계가 검출되기에 별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특정 연구에서는 전자파 세기가 3~4mG만 돼도 어린이 백혈병 발생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암연구소가 고압송전선로 전자파를 2B군 발암물질로 정한 배경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전자파에 3~4mG의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도 한다.

WHO에서는 극저주파의 안전기준을 833mG라고 설정하면서도 WHO 환경보건 기준에 따라 전자파의 위해성은 불확실성이 있으니 새로운 송전선 설치 시 되도록 시민들에게 전자파 노출을 줄이도록 하고 사전주의원칙을 권고하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특정 연구에서 전자파 세기가 3~4mG만 돼도 어린이 백혈병 발생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WHO는 시민들에게 사전주의원칙을 권고하고 있다. [사진 pixabay]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특정 연구에서 전자파 세기가 3~4mG만 돼도 어린이 백혈병 발생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WHO는 시민들에게 사전주의원칙을 권고하고 있다. [사진 pixabay]

‘사전주의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의 일반적 정의는 위험의 파급효과가 매우 높고, 비가역적일 가능성이 있을 경우 위험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부족해도 사전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예방원칙은 위험의 안전성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위험하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사전예방원칙의 ‘사전주의’는 예방이나 선제와는 차별된다. 예방이 금지의 성격이 강하다면, 사전주의는 금지 외에도 위험예측, 시민참여 등 다른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예방과 사전주의의 차이는 위험의 불확실성에 대한 고려 여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예방은 확실하게 일어나는 재난에 대한 정책이지만, 사전주의는 불확실한 위험에 대한 정책이다.

사전주의와 예방, 선제의 차이는 위험의 임박성과 관련이 있다. 임박한 위험에 대한 정책은 선제이지만, 임박하지 않는 위험에 대한 정책은 예방 혹은 사전주의다. 이 사전예방적 정책은 전력 주파수 EMF 용으로 개발됐고, 신중한 회피 정책이 호주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채택됐다.

나는 한전과 지역주민들의 갈등이 심해짐에 따라 극저주파 조사단 전문위원 자격으로 직접 현장을 나갔다. 현장을 돌아보니 공기업인 토지공사와 한전이 이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극저주파 검출로 문제가 된 삼산동 아파트단지는 지중화된 송전선이 초등학교 운동장과 아파트단지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154kv의 특고압 선을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 바로 옆에 설치할 생각을 했을까. 아파트단지가 조성된 시점이 2005년으로 외국에선 극저주파의 건강피해로 논란이 많았던 시기다. 50m 정도만 떨어져도 안전했을 것을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더구나 초등학교와 아파트 바로 옆에 지중화 송전선이 지나가면서 학부모와 주민에게는 지금까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지중화 작업 때 80m 이상 깊게 묻어야

송전선 지중화 작업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전자파 논란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신뢰할 만한 기구를 만들어 시민과의 이견을 조율하고 나아가 전자파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을 예방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중앙포토]

송전선 지중화 작업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전자파 논란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신뢰할 만한 기구를 만들어 시민과의 이견을 조율하고 나아가 전자파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을 예방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중앙포토]

그러고 보니 송전선 지중화 작업 때 전력회사와 토지공사는 시민들의 건강피해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거나, 시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나 보다. 중요한 건 시민과 전력회사, 전문가가 함께 적절한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자파에 대한 시민의 불안을 해소하고, 삶의 불편이나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피해를 예방하는 것도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전자파 논란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신뢰할 만한 기구를 만들어 시민과 전력회사 간 이견을 조율하고, 나아가 전자파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을 예방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현재로썬 전자파 노출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자파 발생원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는 것이다. 송배전 선로를 땅에 깊이 묻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서는 고압송전탑을 지하 80m 아래에 묻기도 했다. 송배전 선로를 지중화할 경우 반드시 이처럼 깊이 묻거나 적절한 차폐장치를 갖춰야 함을 유념해야 한다.

임종한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ekeepe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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