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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년의 숫자로 읽는 경제]18년간 북한에 떼인 돈 1조, 손실 처리도 안했다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올해 안에 동·서해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을 한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개성까지 이어진 경의선 철도 임진강역에서 문산~임진강 구간 전철화 공사 관계자들이 철로 및 승강장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19일 올해 안에 동·서해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을 한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개성까지 이어진 경의선 철도 임진강역에서 문산~임진강 구간 전철화 공사 관계자들이 철로 및 승강장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부는 내년도 철도·도로 협력 등 대북 사업 무상 지원 예산을 올해보다 123억원 늘렸습니다. 대북 융자 예산도 1000억원가량 증액했습니다. 얼핏 보면 공짜로 지원하는 돈보다 빌려주는 돈이 더 많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정을 보면 대북 융자금 역시 북한 당국의 자체 예산처럼 쓰일 공산이 큽니다. 남북협력기금을 관리하는 한국수출입은행은 2000년부터 북한조선무역은행에 9969억원(지난해 말 기준) 규모의 돈을 빌려줬지만, 북한이 갚은 돈은 극히 일부(27억원)에 불과합니다. 남북협력기금을 회계감사한 보고서에도 "회수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설명을 달아 놨습니다.

대출 손실 기록하는 '대손충당금' 북한 대출엔 없어 

일반 시중은행이 다른 나라 은행에 돈을 빌려줬다가 18년 동안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했을까요? 1년만 대여금 연체가 일어나도 그 돈 전액은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대손충당금(손실에 대비해 쌓아놓는 돈)을 설정하게 됩니다. 이 돈은 떼인 돈을 돌려받기 전까지는 고스란히 은행의 손실이 됩니다. 은행 손실이 늘면 예금 이자를 올려줄 여력이 줄어 고객을 모으기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대출 부서 책임자들을 문책해 신용이 좋은 곳을 위주로 대출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손충당금이란 회계상 계정은 재산을 아무에게나 퍼주지 않고 제대로 회수할 책임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재무제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 계정을 통해 특정 기업·국가가 얼마나 위험한 곳에 대출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평양정상회담 사흘째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정상회담 사흘째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정부, 정치적 특수성 반영해 북한 대출엔 손실처리 예외로 

남북협력기금은 북한에 빌려주고 떼인 돈에 대해 대손충당금을 쌓아 손실 처리한 금액이 전혀 없습니다. 이 기금의 운용 관리 규정에 따르면 원칙적으로는 빌려준 돈이 떼이면 대손충당금을 적립해야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 빌려줄 경우에는 예외를 뒀습니다. 남·북한 사이에는 돈이 떼여도 손실로 볼지 말지 결정하기 힘든 미묘한 정치적 특수성이 반영돼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부 당국의 한 관계자는 "북한에 떼인 돈을 손실 처리하지 않는다는 건, 남한이 계속해서 돈을 받아낼 의지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며 "북한이 부채 의식을 갖게 되면 남·북한 간 협상에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다른 개발도상국에 돈을 빌려줄 때는 어떻게 할까요? 개도국에 원조 목적으로 조성된 대외경제협력기금도 원칙적으론 떼인 돈에 대해 대손충당금을 쌓게 돼 있지만, 이 역시 실제로는 쌓지 않고 있습니다. 당국자들은 그 이유를 "세계 전쟁이 나거나 한 나라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주권 국가가 사라질 위험은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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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남북협력기금도 손실 처리 원칙 지켜야" 

회계 전문가 일각에선 이런 식의 정부 회계 처리 방식에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습니다. 남북협력기금은 물론 대외경제협력기금 모두 회수 불가능한 돈에 대해서는 대손충당금을 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만큼, 정확한 손실 추정액을 회계 장부에 기록해야 한다는 겁니다.

국가 회계 장부는 국민에게 걷은 세금을 어떤 곳에 썼는지 투명하게 알리는 보고서와 같습니다. 국민 세금을 다른 곳에 빌려줬다가 연체가 발생하면, 국민에게 손실 규모를 정확히 보고한 뒤, 추후에 돈을 환수하면 과거의 손실을 다시 이익으로 되돌려 놓으면 됩니다. 이를 회계 용어로 "대손충당금이 환입됐다"고 표현합니다.

이런저런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특수한 사정'을 이유로 손실 처리를 미루는 것은 정부의 손실을 일부러 감추는 일종의 '분식회계'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정확한 손실액이 회계 장부를 통해 파악돼야 국민 세금을 신중하게 쓰게 될 것이고, '대북 퍼주기' 비판도 덜 받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정치권 일각 "남북협력기금 '정권 쌈짓돈'" 지적 

국회에서도 남북협력기금이 '정권의 쌈짓돈'처럼 쓰인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양석 자유한국당 의원실은 통일부가 국회에 제출한 1조원 규모 내년도 남북협력기금 중 사용처를 밝히지 않은 돈이 4172억원에 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지적을 무작정 남북 평화 무드를 깨는 '발목 잡기'로 치부해선 곤란합니다. 수십 년째 돈을 갚지 않는 북한 탓에 국민이 입은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회계 원칙에 따라 기록하지 않는다면, 대북 평화 사업이 계속해서 지지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되기 어려우니까요.

'빌린 돈 안 갚는' 북한, 정상적 경제 협력 지속 어려워 

무엇보다 북한이 남한과 진심으로 경제 협력을 하길 바란다면, '신뢰 자산'부터 쌓아 나가야 합니다. 빌린 돈을 갚을 생각도 하지 않는 곳과 정상적인 거래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무디스·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가 만약 북한의 신용등급을 평가한다면, '디폴트(부도)' 등급에 해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랏빚을 갚지 못한 전력도 있는 데다 그럴 의지가 있는지도 불확실하니까요. 국가 신용등급은 그 나라 경제인의 신용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됩니다. 베트남·캄보디아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북한 경제인들이 해외 기업과 자유롭게 거래를 하고자 한다면 북한 정부부터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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