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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신은 브라질 국적 아니다"···'헬브라질' 만든 부패 생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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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사무실. 20년 차 베테랑 경찰 후푸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옵니다. 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서요.
돈세탁 전문가 이브라잉을 쫓고 있는 그는 검은돈을 추적해야 한다고 검사들을 설득하지만 다들 고개를 젓습니다. 후푸의 싸움은 점점 외로워집니다. 남은 건, 문서파쇄기에서 찾은 계좌명세서를 복원하느라 풀이 달라붙어 버린 손뿐이죠.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에서 검은돈을 추적하는 경찰 후푸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에서 검은돈을 추적하는 경찰 후푸

“이 나라를 망치는 건 빈민가의 폭력이 아니다. 부족한 교육도 무너진 의료 체계도 재정 적자나 금리도 아니다. 원인은 따로 있다. 그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것, 그것이 내 임무다.”

최근 몇 년간 브라질을 뒤흔든 초대형 부패 스캔들을 생생하게 담아낸 넷플릭스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2018, 이하 ‘메커니즘’)에서 후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 '엘리트 스쿼드2'의 나스시멘토 대령

영화 '엘리트 스쿼드2'의 나스시멘토 대령

여기, 후푸처럼 외롭게 싸우는 인물이 또 있습니다.
영화 ‘엘리트 스쿼드2’(2011)의 나스시멘토 대령이죠. 브라질 경찰 특수부대(BOPE) 소속인 그는 범죄가 들끓는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이하 리우)에서 마약 갱단을 소탕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마약상을 아무리 없애도 빈민가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 겁니다. 나스시멘토는 그제야 알아챕니다. 마약상을 죽여도, 이들의 돈을 받던 부패 경찰은 반드시 다른 ‘구멍’을 찾아낸단 사실을요.

그는 절망합니다.

“부패 경찰들은 마약상 없이 빈민가를 직접 착취하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빈민가에서 돈을 버는 모든 사람에게 세금을 청구했다. 마약상으로부터 지켜준다는 핑계였다. 이 ‘시스템’은 리우를 장악했다.”

두 남자의 말에서 뭔가 비슷한 걸 발견하셨다면 … 네, 맞습니다. 이들은 강박적으로 ‘체계’(메커니즘, 시스템)라는 말을 반복하거든요. 브라질 사회를 굴리는 그 ‘체계’가 대체 뭐기에 요즘 저리도 떠들썩한 걸까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열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된 자이르 보우소나루 [연합뉴스]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된 자이르 보우소나루 [연합뉴스]

최근 브라질에서 새 대통령이 뽑혔습니다. ‘브라질의 트럼프’라 불리는 아웃사이더, 자이르 보우소나루인데요. “여성과 흑인은 국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독재 시절엔 거리가 안전했다. 그냥 독재로 곧장 가자” 뭐 … 이런 막말로 유명합니다. 국제사회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했지만, 부패ㆍ치안ㆍ경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브라질 국민은 기성 정치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죠. 그 ‘체계’에 질릴 대로 질렸거든요.

그 체계의 추한 실태는 이랬습니다.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의 한 장면. 벽 안에 숨겨진 돈다발을 들여다보는 경찰.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의 한 장면. 벽 안에 숨겨진 돈다발을 들여다보는 경찰.

[등장인물]
페트로브라스(Petrobras):
브라질 국영(반관반민) 에너지기업. 브라질 근해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유전을 개발해온 중남미 최대 규모의 기업이다. 건설업체(하청업체)들과 짜고 뻥튀기 계약서를 꾸미는 데 능하다.
오데브레시(Odebrecht):
1944년 설립돼 항만ㆍ공항ㆍ광산개발 등을 장악한 대형 건설기업. 다른 건설사들과 함께 카르텔을 꾸려 중남미 대륙 온갖 곳에서 공사 독점 중. 뇌물을 먹여 일단 공사를 수주한 다음 추가 계약을 요구하거나 아예 공사를 미뤄버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먹튀’의 달인.
정치인들:
브라질에서 정치한다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정당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뇌물 먹는 게 뭐가 어때서?”

[줄거리]
페트로브라스는 오늘도 유전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석유만이 브라질을 먹여 살린다! 정석대로라면 이것저것 꼼꼼히 따져 건설사를 선정해야 하지만 그건 페트로 스타일이 아니다. 오데브레시처럼 장단이 잘 맞는 곳이 있으니까. 예의 바른 오데브레시와 그 똘마니들은 언제나 공사를 수주하는 대가로 ‘용돈’을 준다. 남들의 눈을 속이는 건 쉽다. 계약금을 부풀려 서명하면 작업 끝이거든. 자, 이제 남는 돈을 세탁해 뒤를 봐줄 정치권에 먹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어쩜 이렇게 다들 거절을 안 해?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의 한 장면. '전직 대통령' 역(왼쪽)을 맡은 배우가 룰라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뒤쪽에는 룰라와 호세프 전 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을 비슷하게 연출했다.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의 한 장면. '전직 대통령' 역(왼쪽)을 맡은 배우가 룰라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뒤쪽에는 룰라와 호세프 전 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을 비슷하게 연출했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과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EPA=연합뉴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과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EPA=연합뉴스]

대충 상황이 그려지시죠? 이런 식으로 페트로브라스와 오데브레시를 비롯한 건설사들이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정치권에 먹인 불법 정치자금은 무려 33억9000만 달러(약 3조9000억원)에 달했습니다. 일명 ‘오데브레시 스캔들’이죠.

이 초대형 부패 스캔들은 ‘라바 자투’(Lava Jatoㆍ세차용 고압분사기) 작전으로 꼬리가 밟혔는데, 기소된 이만 260명이고 이중 125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좌파와 우파 가릴 것 없었고 최고 집권자였던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까지 얽혀 있었습니다. 국고 환수된 돈만 3조6370억원 이상. 얼마나 많은 돈이 뇌물 생태계를 돌고 돌았는지 짐작조차 안 됩니다. 조사 결과, 이 뇌물의 20%가량은 선거자금으로 쓰였다는 게 밝혀졌죠. (※논문 「오데브레시 스캔들로 본 브라질의 정경유착형 부패」 참조)

이런 부패가 한두 명의 일탈이 아닌, 나라를 통째로 삼킨 ‘체계’로 자리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창 개발 중인 중남미 국가들에선 거의 언제나 인프라 공사가 진행 중인데, 이건 대형 건설사들이 ‘해먹기 좋은’ 환경이 되어줬습니다. 여기에 브라질만의 특수한 정치 문화가 한몫했습니다. 국가에서 선거 비용을 대주지 않았거든요. 정당들이 뇌물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 겁니다.

1980년대 브라질을 지배했던 군부가 민주화 세력의 단합을 막기 위해 다당제를 도입한 것도 큰 원인이 됐습니다. 3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다 보니 집권당엔 연정이 필수가 됐고, 다른 당들을 꼬이는 데는 뇌물이 효과가 좋았죠. 집권당엔 돈이 더더욱 필요했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의 한 장면

드라마 '부패의 메커니즘'의 한 장면

이 체계가 워낙 단단하다 보니 라바 자투 수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메커니즘’에서 후푸의 후배 경찰 베레나는 자조하죠.

“브라질은 공정하지 않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브라질 국적도 아니다.”

정치권이 그 모양이니 하부 조직이라고 멀쩡할 리가요. ‘엘리트 스쿼드2’에서처럼 브라질에선 마약상과 깊숙이 연계된 부패 경찰을 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부패의 사슬은 종종 주지자와 같은 지역 정치인들에게까지 연결돼있고요.

영화 '엘리트 스쿼드2'의 한 장면. 빈민가에서 특수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경찰들.

영화 '엘리트 스쿼드2'의 한 장면. 빈민가에서 특수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경찰들.

부패는 단순히 부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제, 치안 문제와도 연결돼 있죠.

부패ㆍ관료주의 등 이 나라 특유의 비능률을 일컫는 ‘브라질 코스트’란 말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영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상파울루 무역관장은 책 『브라질은 바나나를 닮았다』에서 “브라질 코스트 때문에 한 기업이 브라질에서 생산할 때 다른 나라에 비해 70%의 비용이 더 든다”고 지적합니다. 또 “부패는 소득의 불평등과 사회적 비용을 가져온다. 최근 IMF의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에서 부패만 없다면 1인당 GDP가 30%는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고 꼬집죠.

경기 불황 속에서 소득 불평등이 심해지며 그렇지 않아도 악명 높은 브라질 빈민가(파벨라)의 치안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2016년 브라질에서 살해된 사람은 6만 명이 넘는데 이는 “1945년 일본 나가사키 지역 원자폭탄으로 죽은 피해자 수와 비슷한 수준”(같은 책)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치안 불안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국내총생산의 5.4%인 약 86조원(2014년 기준)에 달하고요.

리우의 파벨라(빈민가) '산타마르타'의 모습 [중앙포토]

리우의 파벨라(빈민가) '산타마르타'의 모습 [중앙포토]

그러니 현재 브라질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부패를 뿌리 뽑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시스템’을 개혁하는 수준으로요. 브라질 정부는 부패 스캔들이 터진 후 선거 비용을 국고로 지원해주는 등 여러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섰습니다만, 이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라거든요.

보우소나루는 “치안을 위해 도시에 군대를 투입하겠다”는 말로 표심을 얻었지만 역시 미봉책일 뿐입니다. 그는 ‘라바 자투’ 수사를 이끌어 스타가 된 세르지우 모루 판사를 법무장관에 지명했는데 그나마 부패 수사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있어 다행일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브라질 국적이 아니다”며 자조하기에는, 중남미에서 가장 크고 정치ㆍ경제적으로도 리더인 이 나라의 잠재력이 여전히 어마어마하니까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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