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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여성적인 옷이 가장 파워풀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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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호 08면

여성스럽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이름난 에르뎀의 디자이너 에르뎀 모랄리오글루가 모델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퍼스트뷰코리아

여성스럽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이름난 에르뎀의 디자이너 에르뎀 모랄리오글루가 모델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퍼스트뷰코리아

에르뎀 모랄리오글루(Erdem Moralioglu·41)는 ‘색깔 있는’ 디자이너다. 2005년 런던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한 이후 자신만의 ‘에르뎀(ERDEM)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고풍스러운 꽃무늬와 자수로 손꼽히는 디자인은 여성스러움과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편집매장 ‘분더샵’과 협업한 #영국 디자이너 에르뎀 모랄리오글루

그 색깔의 힘일까. 자신을 돋보이려는 세계의 파워 우먼들이 그의 옷을 찾는다. 니콜 키드먼, 시에나 밀러 등 톱스타 배우들부터 미셸 오바마,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빈까지 모두 고객 리스트에 올라 있다. 최근에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브랜드들이 잇따라 협업의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다. 에르뎀 스타일은 어떻게 빚어졌고, 얼만큼 선명해졌을까. 한국을 처음 찾은 그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지난달 17일 만났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국은 처음이라면서, “근사하다” “생동감 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방한도 어찌 보면 한국에 대한 현실적 탐색이었다. 그는 서울 청담동 편집매장 ‘분더샵’과 협업한 단독 컬렉션을 론칭했다. 에르뎀의 꽃무늬를 드레스가 아닌, 후드 티셔츠에 박았다. “이 에너지 넘치는 서울의 특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고 그는 말했다.

‘분더샵’과의 협업 컬렉션에서는 에르뎀 고유의 꽃무늬를 후드 티셔츠에 넣었다.

‘분더샵’과의 협업 컬렉션에서는 에르뎀 고유의 꽃무늬를 후드 티셔츠에 넣었다.

협업을 좀더 소개한다면.  
ERDEM ―“서울의 많은 사람이 하이 앤 로우(High & Low)를 소화한다. 샤넬 슈트에 운동화를 신는 식인데, 클래식과 스트리트 스타일을 하나로 묶어내는 모더니티다. 흔히 에르뎀 하면 공식적인 드레스를 떠올리는데, 이번 컬렉션으로 에르뎀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기회가 될 거라도 여겼다.”

지난 1년 사이 화제가 되는 협업이 많았다. 패스트 패션(H&M)부터 무대 의상(안무가 크리스토퍼 윌든의 로열 발레단 공연), 화장품(Nars)까지 영역도 다양하다.  
ERDEM ―“시작은 다 달랐는데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쨌든 협업을 하면 공부하는 학생이 된다. 가령 발레 협업은 규제에 대한 훈련이었다. 내가 집중하는 컬러나 실루엣, 소재에 앞서 인체와 움직임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H&M 협업에서는 처음으로 남성복을 만들면서 에르뎀의 남성상을 그려봤다. 이번 분더샵과의 협업도 내 기존 리조트 컬렉션을 ‘큐레이팅’하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할리우드 스타에서 영국 명문가 여인이 된 아델라 아스테어를 그린 2019 가을·겨울 컬렉션

할리우드 스타에서 영국 명문가 여인이 된 아델라 아스테어를 그린 2019 가을·겨울 컬렉션

한국의 패션뿐 아니라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ERDEM ―“물론이다. (휴대폰을 뒤적이며) 가보고 싶은 곳들이 있다. 아티스트 김환기 작품이 있는 환기 미술관과 한국가구박물관이다. 한국의 전통 가옥을 볼 수 있다는 ‘최순우 옛집’ 말고도 국제갤러리·아라리오갤러리 역시 머리 속에 있다. 아, 갤러리현대나 아름지기는 어떤가. 나는 과거 왕실이나 로열 패밀리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서 서울 시내 고궁을 거닐어 보고 싶다. 또 아모레퍼시픽 뮤지엄도 굉장히 특별하다고 들었다. 세 곳만 꼽는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와, 어떻게 알게 된 곳들인가.
ERDEM ―“내 파트너가 건축가인데, 사무실 직원 중에 한국인이 있어서 몇몇 장소들을 제안했고 그중 고른 것들이다.”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워낙 패션계에서도 책·사진·작품 컬렉터로 알려져 있다.
ERDEM ―“8년 전부터 수집에 나섰다. 사람들이 스포츠카나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모으는 마음으로 나는 작품과 책을 모은다. 참, 한국의 1960~70년대 고서들을 구할 곳이 있는가? 초판본 말이다. 읽지 못하지만,상관없다. 나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서관의 멤버다. 거기서도 늘 어떤 책을 사야할지 고민하곤 한다.”

가장 아끼는 수집품은 뭔가.  
ERDEM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두 점이 있는데, 70년대 작업한 사진 콜라주 작품이 최고 애장품이다.”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자라며 여성성에 매료  

이야기를 품은 책과 공간, 예술작품에 대한 애정은 그의 컬렉션과 맞닿아 있다. ‘내러티브’야말로 그에겐 ‘방아쇠’이기 때문이다. 2019년 봄·여름 컬렉션 역시 ‘스텔라와 패니(Stella and Fanny)’라는, 1860년대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이 실존 인물들은 남다른 성 정체성으로 1870년대 재판에 회부됐지만, 여자 옷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행위라 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받았다.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내러티브를 위해 특별히 인물을 내세우는 것도 에르뎀의 특징이다.  
ERDEM ―“맞다. 특정한 누군가를 잡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올 가을·겨울 시즌만 해도 브로드웨이 댄서이자 안무가였였던 프레드 아스테어의 누나를 내세웠다. 초기 할리우드 스타였다가 영국 명문가 귀족과 결혼한 여인이다. 그가 살았던 아일랜드 성을 찾아 당시 어떤 옷을 입었을까 그려봤다. 풍성한 롱 스커트에 퍼 코트를 입은 컬렉션이 그렇게 나왔다. 하나의 아이템을 어떤 상황에 부닥친 인물에 넣으면 굉장히 특별한 것으로 변모한다.”

이야기는 매번 달라져도 에르뎀 스타일은 분명하다. 어떤 배경이 있나.  
ERDEM ―“2003년 나의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졸업 작품도 지금과 같다. 여전히 여성스러운 자수, 꽃 일색이다. 나는 여성성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이란 13년 전 내가 처음 만든 옷을 지금 입어도 새 옷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여성성에 주목한 계기가 있나.
ERDEM ―“5~6세부터가 아닐까. 내게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 부모님은 우리를 동등하게 키웠고, 남자가 여자가 어때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인형을 갖고 놀아도 전혀 장벽을 두지 않으셨다. 어릴 때부터 여성의 존재에 가깝게 접근했고, 여성이라는 존재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여자들이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하는지, 어떻게 슬퍼하는지 등등 말이다.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나를 매혹시켰다.”

이국적 아름다움 또한 에르뎀의 특징이다. 아버지는 터키 출신, 어머니는 영국 출신, 게다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자랐다는 배경이 영향을 미치나.
ERDEM ―“글쎄, 하지만 남들과 달리 다양한 문화를 일상에서 접한 건 분명하다. 아버지는 검정 머리·눈을 지닌 전형적인 터키인이었고, 어머니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친할머니 댁에 가면 한 분은 도자기 잔에, 한 분은 유리 잔에 차를 마시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또 어릴 적엔 몬트리올 호수 옆 고요한 동네에서 몽상을 하며 낮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런 것들이 지금 작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을까.”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여성의 삶을 살았던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2019 봄·여름 컬렉션

케이트 미들턴, 메건 마클 등이 찾는 디자이너

올해 5월 영국의 로열 웨딩을 앞두고 에르뎀은 또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예비 신부 메건 마클의 웨딩 드레스를 누가 디자인할 것인가를 두고 에르뎀이 후보에 올랐던 것. 영국 브랜드인데다 특유의 우아함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낙점은 받지 못했지만 에르뎀은 이미 왕실이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이 공식 석상에서 종종 즐겨 입으면서다. 2013년엔 미국 텍사스주 의회에서 상원의원인 웬디 데이비스(Wendy Davis)가 11시간에 걸친 필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하며 에르뎀의 옷을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8년 초 안무가 크리스토퍼 윌든의 발레 공연에 협업한 무대 의상

2018년 초 안무가 크리스토퍼 윌든의 발레 공연에 협업한 무대 의상

톱스타·정치인·왕실 여성들 말고 기대하는 뮤즈가 있나.
ERDEM ―“종종 이런 질문을 받지만 나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빼어난 여성들이 내 옷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하다.”

이들이 당신 옷을 입는 특별히 찾는 이유를 뭐라고 여기나.
ERDEM ―“여성들이 원하는 여성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려내고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가장 여성스러운 것이 가장 파워풀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에르뎀의 옷을 즐겨 입는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빈.

에르뎀의 옷을 즐겨 입는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빈.

메건 마클의 드레스로 회자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왕실로부터 연락을 기다렸나.
ERDEM ―“전혀, 그저 사실이 아닌 것에 소문이 돌 때 기분이 어땠을지만 상상해 달라.”

다년간 백스테이지 메이크업을 맡았던 화장품 브랜드 나스와 협업한 ‘나스 x 에르뎀 스트레인지 플라워 컬렉션’

다년간 백스테이지 메이크업을 맡았던 화장품 브랜드 나스와 협업한 ‘나스 x 에르뎀 스트레인지 플라워 컬렉션’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과는 오래 인연을 맺고 있는데.
ERDEM ―“그가 로열 패밀리가 된 이후 지금까지 여러 벌을 작업했는데, 나로서는 굉장한 영광이다. 그는 매우 아름답고 우아하고 환상적이다.”

2017년 H&M과 협업한 컬렉션

2017년 H&M과 협업한 컬렉션

셀레브리티 이야기에 말을 아끼던 그는 마지막 질문에선 길고, 단호한 말을 쏟아냈다.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패션 시장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온라인으로 재편되는 패션 시장, 늘 새로움을 좇는 밀레니얼 세대, 점점 더 스트리트 무드로 모아지는 트렌드를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런던의 에르뎀 플래그십 스토어는 에르뎀 특유의 여성적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됐다.

런던의 에르뎀 플래그십 스토어는 에르뎀 특유의 여성적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됐다.

“손바닥 안에서 모든 게 통하게 됐지만 몸으로 무언가를 입는 행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나.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스트리트든, 미니멀이든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 영원성이다. 1978년 이브 생로랑이 디자인한 트렌치 코트와 60년대 발렌시아가가 선보인 블랙 시스루 드레스를 우리는 지금도 입을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을 이겨내는, 감정적 애착을 자아낼 옷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목표다. 10년 뒤, 20년 뒤 입지 못할 옷이라면 그것의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에르뎀·퍼스트뷰코리아·나스·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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