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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이선권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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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북한 이선권의 냉면 폭언보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해명이 염장을 지른다. 그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재벌 총수 3~4명에게 직접 확인했지만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고 이선권을 막아줬다. 그 자리에서 냉면을 먹었던 사람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구광모 LG 회장, 김용환 현대차 부회장, 손경식 경총 회장, 박용만 회장이다. 홍 원내대표가 3~4인에게 전화했다니 1~2명한테는 확인하지 못한 셈이다.   홍영표는 적폐청산 정권의 권력자다. 그런 이가 전화를 걸어 ‘이선권이 진짜 냉면 목구멍 발언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넙죽 대답할 간 큰 재벌이 어디 있겠나. 만일 홍영표의 전화를 받지 않은 재벌이 이선권한테 모욕을 당한 주인공이라면 여간한 용기를 내지 않고 이 정권 아래서 진실을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재벌들도 홍영표가 ‘그런 일 없다’고 못을 박았으니 다른 말을 할 일이 없어졌다.

‘냉면 목구멍’ 발언 한국인에 대한 공격 #일개 망동분자가 남북관계 망치고 있어

MBC 방송은 “옥류관 만찬 자리에 있던 한 참석자의 측근” 얘기라며 홍영표의 주장에 가세했다. 이선권이 웃으면서 ‘뭘 하신 게 있다고 더 드십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냉면 목구멍 소리를 못 들었다는 점에서 홍영표를 뒷받침하는 보도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선 더 큰 모욕감을 느낄 만한 상소리다. 방송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그런 일 없다’고 아예 뭉개려는 홍영표와 달리 진실의 흔적을 일부 남겼다. 냉면이 목구멍에 넘어가냐고 면박을 주든, 뭘 한 게 있다고 더 먹냐며 이죽거리든 이선권이 한국의 대표 기업인을 먹는 것 갖고 조롱하고 말 폭력을 행사한 사실은 분명해졌다. 이선권은 한국인을 공격했다. 진실은 10월29일 국회 국정감사 때 정진석 의원이 묻고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시인해 회의록에 명기된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만한 게 없다.

한국의 여론은 하나로 모아지고 있다. 이선권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집권층 일각에선 북한한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선권 발언을 해프닝이나 가짜뉴스로 몰아가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여론은 악화될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멘토 격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한국은 여론 정치를 하는 나라인데 이대로는 남북대화도 대북 투자도 어렵게 됐다. 문 대통령이 힘들어졌다. 여론이 굉장히 나빠져 남북관계를 망치게 됐다”고 한탄할 정도다. 서훈 국정원장은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니다. 분명 짚어야 할 문제”라고 했다는데 일부 집권층의 슬쩍 넘어가려는 꼼수에 굴복하지 않길 바란다.

이선권 사태를 남북관계로 벼락출세해 눈에 뵈는 게 없는 일개 망동가의 언행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심리 밑바탕에 ‘우리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까불지 마라. 너희들은 그저 갖다 바치기나 하라’는 북한 지도부의 인식이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응당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할 필요가 있다. 연내 한국을 방문해야 할 김정은도 이선권 때문에 차가워진 남쪽 여론을 무시하다 낭패할 수 있다. 김정은이 한국을 조공국쯤으로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면 이선권을 당장 잘라야 한다. 김정은이 거부하면 한국 정부는 이선권을 기피 인물로 지정해 일절 상대하지 않는 게 정상국가의 수순이다. 아무리 평화가 중요하다 한들 한국인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공격하는 것까지 모른 체해선 곤란하다. 우리가 돈이 없나 군사가 없나 자존심이 없나.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