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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선

유승민의 '깊은 고민', 김한길의 '의미있는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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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김한길의 특별한 1년’(지난 10월26일자 논설위원이 간다), 그 이후의 얘기다.

한국당 탄핵프레임 부상, 보수통합 마이너스효과 #김한길은 10년 전 대통합민주당으로 분열구도 극복

서울 이촌동 옥탑방에서, 이제는 건강을 상당히 회복한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요즘 말로 ‘웃픈’대목이 있었다.
 “글쎄, 나도 그거 잘 모르겠네.” 그에게 지금 바른미래당 소속이냐고 물었을 때 나온 대답이었다.
 김 전 대표는 1년 전만 해도 국민의당 소속이었다. 그런데 암 투병을 거의 마치고, 이제 눈을 떠보니 국민의당이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한국 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만약 투병 중이 아니었다면 바른미래당 창당에 찬성했을지, 반대했을지 물어봤다.
또 한번 “잘 모르겠네”란 답이 나왔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김 전 대표가 ‘유승민’이란 이름을 꺼냈다.
 “둘이 ‘여야 공동목표’를 위한 국회의원 대토론회도 주최하고 그랬지요. 싸울 땐 싸우더라도, 여야가 공동목표 없이 정치한다는 게 너무 소모적이잖아?” 그게 2014년 일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호의적 표현이었다.

지난 6.13 지방선거 참패다음날인 6월14일 서울 중구 순화동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는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 그는 이날 이후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만 할 뿐 정치문제엔 함구하고 있고, 언론접촉도 피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6.13 지방선거 참패다음날인 6월14일 서울 중구 순화동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는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 그는 이날 이후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만 할 뿐 정치문제엔 함구하고 있고, 언론접촉도 피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이런 대화가 오갔는지도 몰랐을텐데, '김한길의 특별한 1년'을 알게 된 유 전 대표가 김 전 대표에게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걸었다. 조만간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본다고 한다.
유 전 대표는 지난 6월 지방선거 이후 언론 접촉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그의 거취에 관해 탈당설 등 갖가지 억측이 나도는 중이다.

그런 유 전 대표와 지난 2일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정치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완곡하나마 분명하게, 그리고 예상대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고민은 깊고…지금은 어떤 말도 하기 힘들어요. 자유한국당 저러고 있지, 바른미래당은 결국 정체성, 생각들이 많이 다르고…. 그런데 나는 또 책임이 있잖아요. 안철수 대표는 지금 없지만, (함께) 당을 만들었고, 지방선거에 진 책임도 있고. 그동안 조용히 사느라고 일체 인터뷰를 안 했는데, 당분간 계속 안 할 겁니다.”

유 전 대표와 만날 수 있었다면 이걸 먼저 물어봤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고민 중입니까.’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거절의 말속에 고민의 지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야권의 명제는 사실 ‘통합’, 정확히는 ‘보수통합’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그런데 지금 한국당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나름 보수통합의 그림을  그리려 한다는데 친박계나 전원책 변호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정에 대한 찬반 논란을 꺼내 들고 있다. 어디 한번 탄핵프레임을 세워놓고 보수통합을 얘기해 보라. 재분열은 몰라도, 통합은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지금 야권 상황을 보면 10여 년 전 여권 모습이 떠오른다. 서로 닮아서가 아니라 너무 대조적이어서다.

새누리당이 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뉜 것처럼, 당시 새천년민주당도 열린우리당과 호남 중심 민주당으로 갈라져 있었다. 외양은 비슷하다. 그런데 당시 여권에선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정치적 상상력이 없으면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①2007년 2월 열린우리당을 1차 탈당한 세력(23명)이 ‘중도개혁통합신당’(대표 김한길)을 만들고 ②이들이 호남 민주당(대표 박상천)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을 만든 뒤 ③이 세력이 다시 열린우리당 잔여 그룹 및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진영을 규합해서 ④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사실상 ‘도로 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때 주역이 바로 김한길 전 대표였다. 물론 지금의 유 전 대표처럼 그 역시 깊은 정치적 고민이 있었다.

지난 2007년 12월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총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김한길 전 대표.[중앙포토]

지난 2007년 12월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총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김한길 전 대표.[중앙포토]

“당시 정권 재창출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어요. 포기하고 그대로 져도 되는 거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저들에게 진상할 순 없다 생각했지.(진상하는 건) 우리가 집권한 게 역사적 퇴보였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니까. 그래도 한번 해보겠다면 새로운 틀걸이가 필요했어요.”

그 새로운 틀걸이를 만드는 과정이 열린우리당을 공중분해시키고 도로민주당을 만들기까지 당을 몇번씩 만들었다 부수는 과정이었다. 그야말로 희대의 정치쇼였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욕은 좀 먹었어도 '분열'했던 세력을 '통합'시켰기에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지금 한국당과 바른정당 혹은 바른미래당이 분열된 채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음을 본다면,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돌아봤을때 절대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김 전 대표가 “정치란 나한테 끊임없는 좌절이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좌절이었다”고 말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과연 야권에는 지금 의미 있는 좌절을 불사할 정치력이 있는가. 보수통합 운운하던 한국당은 점점 원내대표 경선(12월)과 전당대회(내년 2월) 분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도생을 위한 당권경쟁의 소용돌이만 커져갈 것이다. 유 전 대표의 고민도 얼른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보수통합론은 잠깐 취미 삼아 꺼낸 거란 말인가 뭔가. 지금 야권을 보면 왠지 축이 빠진 바퀴의 살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