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씨와 나, 우리는 동지야. 남자도 여자도 아니야. 영화하는 동지!”
배우 신성일 빈소에 추모의 물결 #55년 함께한 엄앵란씨 소회 밝혀 #“늘그막에 좀 재밌게 살려 했는데 …” #평생을 영화동지로 지냈던 남편 #“수고했다 고맙다 미안하다” 유언 #사회 각계 인사 조문 행렬 이어져 #최불암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4일 고 신성일의 빈소에서 만난 아내이자 배우 엄앵란(82)씨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부부이자 동료 배우로서 신성일의 모습을 묻는 기자들에게 “가정 남자가 아니라 사회 남자”라고 했다. “대문 밖의 남자이지 집안의 남자가 아니야. 뭐든 일에 미쳐가지고 집안은 나한테 다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어요. 그러니 이런 역할도 소화하고 저런 역할도 소화하고 어려운 시절 히트작 같은 것도 내서 수입 올려 제작자들 살렸지. 그 외에는 신경을 안 썼어요. 집에 늦게 들어와 자고 일찍 나가고. 스케줄이 바쁘니까. 그것밖에 없어. 늘그막에 좀 재밌게 살려고 그랬더니. 이렇게…”.
마지막까지 내년 찍을 새 영화를 준비했던 데 대해서는 “영화 물이 뼛속까지 들어가서 아플 때, 까무러쳐 넘어가는 순간에도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이런 사람이 있어 오늘날 화려하고 좋은 한국영화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사흘 전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그는 딸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딸 아이가 ‘어머니한테 말씀하실 거 없냐’니까 참 수고하고 고맙다고, 미안하다 그러라고 얘기를 했대요. 역시 그 남자는 사회적인 남자예요. 사람이 존경할만해서 55년을 살았지 흐물흐물하고 능수버들 같은 남자였으면 못 살았어요. ”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로는 “그저 저승에서 못살게 구는 여자 말고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서 재미있게 손잡고 구름 타고 하늘 타고 밖에 슬슬 놀러 다니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은 별거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고인이 폐암 3기 진단을 받았을 때 아내 엄앵란씨가 병원비를 내며 “마지막까지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별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 있더라고요. 그때마다 내가 신성일씨와 나는, 우리는 동지야, 남자도 여자도 아니야, 영화하는 동지! 이러니까 끝까지 가야돼. 전진 또 전진. 그렇게 눌러버렸죠.”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내온 조화를 비롯해 각계의 조의와 조문이 줄을 이었다. 오석근 한국영화진흥위원장은 “내년이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데 신성일 선생님이 안 계신다는 게 상상이 안 된다”며 “선생님의 의미를 돌아보는 노력을 영화인들과 함께하려 한다”고 말했다. 배우 이순재씨는 “마지막 본 지 오래됐는데 그때는 건강한 로맨스 그레이의 모습이었다”며 “한국영화 획기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너무 일찍 갔다”고 애도했다. 배우 최불암씨는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고 추모했다. 그는 “70년대말 스쳐가는 역할을 했을 뿐 작품을 같이 한 적은 없다”며 “신성일 선배님은 저희는 감히 엄두를 못 낸 멜로 주인공이자 굉장히 로맨틱한 존재”라고 했다.
‘초우’ 등 20여편의 영화를 함께한 정진우 감독은 “가장 흥행성 있는 스타였고, 가장 잘생긴 남자 청춘배우이고, 가장 불량스러웠던, 불량스럽게 눈 부릅뜨면 사나운 깡패처럼 보이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명배우였다”고 돌이켰다. 언론인 출신의 영화평론가 김두호씨는 “쉽게 쓰지 못하던 ‘톱스타’라는 말 자체가 신성일부터 비롯됐다”며 “그에게는 늘 톱스타라는 말이 따라붙었다”고 전했다.
선배 배우이자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신영균 명예회장은 “배우 활동하며 감독하는 영화에 주연을 맡아달라고 해서 출연한 일도 있다”며 “시상식에 들것에 실려서라도 꼭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고인은 오는 9일 열리는 제8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에 공로예술인 수상자로 선정돼 있다.
이날 빈소에는 배우 김수미·독고영재·문성근·문희·박상원·박정숙·선우용녀·이동준·윤일봉·조인성 등 다양한 세대가 조문했다. 시나리오 작가인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이해룡 한국영화인원로회 이사장·김국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정지영 영화감독·방송인 이상벽씨 등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6일이다.
영화인 신성일이 걸어온 길
1959년 신필름 전속 배우 계약 체결
1960년 ‘로맨스 빠빠’(신상옥 감독)로 데뷔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감독)로 스타 반열
1964년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으로
23만 관객 동원. 배우 엄앵란과 결혼
1967년 ‘동심초’‘청춘극장’ 등 주연작 51편 출연
1971년 ‘연애교실’로 영화감독 입문
1974년 ‘별들의 고향’(이장호 감독) 46만 관객 동원
1989년 영화제작사 성일시네마트 설립
2000년 강신성일로 개명. 제16대 국회의원 당선
2013년 ‘야관문: 욕망의 꽃’(임경수 감독) 출연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