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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제출할 증거 없나요" 판사 말에 쉽게 대답했다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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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정세형의 무전무죄(無錢無罪)(9)

어떤 사람이 곗돈을 떼였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원고의 주장을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어 판결에 가게 되면 전부 기각될 가능성이 높아 소송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원고는 조정에 응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어떤 사람이 곗돈을 떼였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원고의 주장을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어 판결에 가게 되면 전부 기각될 가능성이 높아 소송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원고는 조정에 응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어떤 사람이 곗돈을 떼였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계주였던 상대방은 원고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런데 문제는 원고가 곗돈을 전부 현금으로 전달해 주었고, 그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즉 원고가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원고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담당 재판부에서는 위 사건을 조정절차에 회부했다. 피고는 적당한 금액이라면 조정에 응할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원고는 자신이 어렵게 모은 피 같은 돈을 아무 이유도 없이 왜 깎느냐며 무조건 전부 돌려받아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조정위원은 원고에게 사정은 딱하지만, 곗돈을 주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 판결 절차로 가게 되면 전부 기각될 가능성이 높으니 일부만이라도 돌려받고 소송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하지만 원고는 너무 억울하다면서 조정에 응하지 않았다.

다소 냉혹하지만 정해진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하는 소송에서 억울함만 가지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이번 글에서는 소송을 진행할 때 유의해야 할 부분, 특히 판사가 하는 말 중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을 알아본다.

“더 제출할 증거 없나요”

재판에서 판사가 원고에게 '더 제출하실 증거는 없냐' 라고 묻는다면 적어도 자료를 좀 더 찾아보겠다고 대답하고 어떻게든 추가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 안전하다. [사진 pixabay]

재판에서 판사가 원고에게 '더 제출하실 증거는 없냐' 라고 묻는다면 적어도 자료를 좀 더 찾아보겠다고 대답하고 어떻게든 추가 증거를 제출하는 것이 안전하다. [사진 pixabay]

어떤 사건에서 원고가 하는 말을 다 들은 판사가 원고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출하신 증거만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데, 혹시 더 제출하실 증거는 없나요.” 그러자 원고가 대답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다 제출했습니다. 더는 제출할 자료는 없습니다.”

위 사안에서 과연 판사는 원고에게 더 제출할 자료가 있는지 그 자체가 궁금해서 물은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원고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우니 이기고 싶으면 증거 자료를 더 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을까. 분명 후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는 판사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신이 가진 자료는 이미 다 냈다며 소송을 끝내고 말았다.

재판은 신중하게 진행된다. 원고가 자료를 제출하면 피고에게 이에 대해 반박할 기회를 준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원고가 애초부터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면 판사의 입장에서도 무작정 피고에게 반박 자료를 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청구 내용에 대한 증명책임은 원고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재판에 갔는데 판사가 원고에게 지금까지의 자료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친다면 가진 자료는 다 냈으니 그냥 판결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료를 좀 더 찾아보겠다고 대답하고, 어떻게 해서든 추가 증거를 내는 것이 안전하다. 잘 모르겠다면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주변에 물어서라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정 한번 해 볼까요”

재판부에서 조정에 회부하는 경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왜 빨리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하기 싫은 조정을 강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이것이 약자를 위한 판사의 배려인 경우도 있다. [중앙포토]

재판부에서 조정에 회부하는 경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왜 빨리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하기 싫은 조정을 강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이것이 약자를 위한 판사의 배려인 경우도 있다. [중앙포토]

자신은 정말 억울하고, 증거 자료도 충분하니 무조건 전부 승소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재판부에서 조정에 회부하는 경우가 있다. 화해 권고 결정을 하거나 강제조정 결정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왜 빨리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하기 싫은 조정을 강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것이 약자를 위한 판사의 배려인 경우도 있다. 맨 처음 언급한 사례처럼 원고가 정말 선량해 보이고, 딱해 보이지만 원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어 이대로 가면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경우 판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조금이라도 돈을 받게 해 주는 것이고, 이를 위해 조정에 회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되더라도 무조건 조정을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때는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상황을 돌아보고, 왜 재판부에서 조정 절차에 회부한 것인지 그 의도를 깊이 생각해 본 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더 할 건 없으시죠”

1심에서 패소하면 보통 항소를 하게 된다. 그런데 항소심이라도 1심 법원에서 한 판단을 쉽게 뒤집을 수는 없다. 따라서 1심 판결을 뒤집기 위해서는 기존에 했던 주장을 보완하거나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는 등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일 1심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기존에 했던 주장을 똑같이 뒤풀이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이 번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항소심 첫 재판에서 재판장이 “더 할 건 없으시죠”라며 재판을 종결하려 하는 경우라면 항소가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대로 재판부에서 항소이유를 충분히 공감하는 경우라면 이번에는 상대측에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주장이나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항소를 하는 경우 항소심 판사가 1심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항소이유와 이에 대한 증거자료를 충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지금 당장 증거자료를 제출할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지면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때엔 향후 입증계획도 미리 밝히는 것이 좋다.

판사의 말 흘려듣지 말아야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현실적인 변론기일은 대부분 3-5분 정도로 매우 짧다. 시간이 짧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판사가 하는 말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불의의 일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판사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제공]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현실적인 변론기일은 대부분 3-5분 정도로 매우 짧다. 시간이 짧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판사가 하는 말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불의의 일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판사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제공]

변호사에게도 소송은 어렵다. 영원불변한 진실은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소송에서 인정되는 ‘사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소송은 당사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과 이에 대한 자료를 제출하고, 판사가 이에 대해 판단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누가 더 논리적인 주장을 하고, 증거 자료를 충실하게 제출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소송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대응 태도나 증거자료에 따라 소송의 양상이 전혀 달라지고, 하나의 사실관계를 놓고도 상대방은 물론 판사조차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소송에는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소송을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소송을 직업으로 삼는 변호사에게도 소송은 어려운데 하물며 평생 법원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소송 경험이 없고 법률적 지식이 부족하면 소송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고, 그래서 자신은 중요하다고 생각해 제출한 자료 역시 증거로서의 가치가 충분치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나 홀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지나치게 결과를 낙관하는 일반인이 적지 않다. 불의의 일격-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판결-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판사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와 달리 당사자가 법정에 출석해 변론하는 변론기일은 대부분 3분에서 5분 정도로 매우 짧다. 판사 한 명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 수가 엄청나게 많은 현실 속에서 당사자가 하는 말을 일일이 다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은 서면으로 제출하고, 법정에서는 중요한 부분만 확인하는 식으로 재판이 진행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짧다고 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판사가 하는 말을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재판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소송까지 온 이상 자신이 설득해야 할 사람은 판사이며, 판사는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큐렉스 법률사무소 정세형 변호사 jungseh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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