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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이러려고 그 난리 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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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주일 대사관에서 일할 서기관급 외교관을 모집했는데 신청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서 외교부에 물었다가 좀 머쓱해졌다. 도쿄처럼 일이 많아 출세 코스로 통하던 다른 공관들도 사정이 한결같다는 것이다. 파리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도 그렇고, 주중 대사관 역시 서기관급 이하 희망자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대신 한가하고 풍광 좋은 유럽이나 남미에서 우아하고 품위 있는 외교관으로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기는 하다.

지지층·지지율만 바라본 YS 청와대 #주변국 외면 속 경제파탄 못 막았다

그래도 걱정은 남는다. 과거엔 볼 수 없던 집단적 ‘날라리풍’인데 이유가 그럴듯하다. 골치 아픈 외교 최일선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권 바뀌면 적폐로 몰리느니 ‘알아서 기련다’는 복지부동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 정부의 한·미 방위비 협상과 관련해 직위해제된 대사가 있고, 위안부 합의에 참여했다고 불려들어온 외교관도 있었다. 얼마 전 차관급 인사 후 그나마 고위직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북핵·미국통’은 모조리 옷을 벗었다.

외교부만도 아니어서 국정교과서, 댓글 관련자는 수사받거나 구속됐다. 해외연수마저 취소됐다. 심지어 전 정권에서 잘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부역자 취급을 받는 실무자급 공무원도 많다. 그래놓고 문재인 대통령은 장관이나 참모들을 공개석상에서 꾸짖는 경우가 최근 들어 부쩍 잦아졌다. 청와대 수석회의에선 ‘공직자의 가장 기본은 유능함’이라고 강조했다. 1년 전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된다’던 대통령이다.

공직사회가 얼마나 안 움직이면 저럴까 싶어 공감은 간다. 하지만 야단친다고 팽팽 돌아갈진 잘 모르겠다. 공무원들인들 적폐 대상으로만 보는데 무슨 의욕이 넘칠까. 물론 공직사회 보신주의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눈만 굴린다는 복지안동(伏地眼動), 낙지처럼 뻘 속에 숨는다는 ‘낙지부동’이란 말이 나돈 지 오래다. 그래도 정권 초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 세종시 맥줏집엔 청와대를 안주 삼아 ‘제2의 변양호가 되느니 젖은 낙엽이 되자’는 결의가 넘친다고 한다.

얼마 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난 문 대통령은 ‘같은 시기에 닮은 모습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지향하는 가치도 비슷하다. 닮은 점이 많아 쌍둥이 같다’고 말했다. 출발점이 같다는 건 맞는 말이다. 두 사람은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업고 대선에서 압승했다. 일자리 정부를 내세운 점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불과 1년여 만에 프랑스 공무원들은 옛날 우리 공무원처럼 빠릿빠릿해졌고, 우린 ‘즐기는’ 과거 프랑스 관리들 모양이 됐다. 프랑스 일자리는 속도감 있게 늘었고, 우린 얼어붙었다.

마크롱은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무사안일, 복지부동, 탁상행정이란 적폐 공직문화와 싸웠다. 공직사회에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일을 안 하거나 못할 때는 퇴출시키는 길을 열었다. 우린 ‘이명박근혜’ 손보기에 올인했고, 그때 공무원을 솎아냈고, 주변 강대국과 다투고, 외교관은 그 지역 근무를 기피한다. 많은 사람이 노무현 정부 데자뷔를 말하지만 노 정부 땐 이라크 파병과 같은 한·미 간 호재도 많았다. 지지층은 질색했지만 말이다.

문 정부는 오히려 대통령 인기가 떨어질 때마다 사정 카드를 빼든 YS 정부를 닮았다. ‘일본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로 지지율을 높인 YS는 경제도 인기 위주로 다뤘다. 문 대통령이 어제 또다시 적폐청산을 거론했다. 넉 달 만에 열린다는 대통령 주재 경제회의는 경제 민주화, 재벌 개혁이 주제라고 한다. ‘코드’와 ‘내 편’에 일관성이 있어 보기는 좋다. 그런데 적폐청산 1년 반에 청산된 적폐는 도대체 뭐가 있는지 묻고 싶다. 정말 이러려고 그 난리를 쳤는지.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