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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원전안전 사령탑의 공문서위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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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강정민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의 돌연 사퇴는 영 석연찮다. 국감 당일날 차관급 인사가 사퇴한 것도, 청와대가 즉각 사표를 수리한 것도 이례적이다. ‘꼬리짜르기용 사퇴설’이 도는 이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시계추를 돌려 10월 12일 국정감사장으로 가봤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 국감 현장, 거기 해답이 있다. 최연혜 자유한국당 의원이 묻고 강정민 위원장이 답하는 장면이다.

꼬리짜르기용 사표 의혹에 #박찬주 때와 다른 정부 대응

“(최연혜)2015년 3월 1일부터 ‘소형 혁신 SFR 노심 개념 연구’에 강정민 (당시 카이스트) 교수가 참여했고, 연구비로 274만3632원이 지급됐다. 그런데 원안위가 제출한 자료에는 이 항목이 빠져 있다. 누가 뺐나” “(강정민)나는 내 이름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지도 몰랐다.”

실랑이가 이어지다 오후에 재개된 국감에서 진실이 드러났다. 최연혜는 원안위 자료제출 담당자를 불러 세웠다.

“(최연혜)왜 자료에서 저걸(강 위원장 부분) 삭제해서 (국회에) 보냈나? 지우라는 (위원장의) 지시가 있었나?” “(임종윤 원안위 과장)비서실을 통해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

담당자가 머뭇거리자 “대답 똑바로 하라. 공문서 위조다. 잘못하면 실무자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며 최연혜가 집요하게 추궁했다. 지켜보던 강정민이 결국 “제가 지시했습니다”라고 털어놓는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된 건 원안위의 규정 때문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10조는 ‘최근 3년 이내 원자력 이용자 또는 원자력 이용자단체로부터 연구개발 과제를 수탁한 사람’을 원안위원 결격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이미 위원이 된 사람도 당연 사퇴해야 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전의 안전을 책임지는 최고 기관이다. 한 치의 빈틈, 하나의 거짓이 자칫 대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원전 업계와의 유착 가능성을 차단하는 엄격한 결격사유 조항이 명시된 것도, 위원장 포함 9명의 위원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정민 사태’는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코드 인사와 부실 검증이다. 애초 강정민은 임명 때부터 부적절 논란이 컸다. 이력부터 원자력 안전 분야와는 거리가 멀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때 건설 반대 쪽 전문가로 참여했다. ‘코드’만 찾다 독립성·전문성을 포기한 인사란 평이 많았다. 여기에 부실 검증까지 이번에 확인된 셈이니 청와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둘째, 국가기관이 공문서 위조에 동원됐다. 문제의 원안위 자료는 2014년 이전 강정민의 연구 참여 내역 수십 건은 적시해 놓고, 2015년 이후 내역만 삭제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원안위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임종윤 과장은 “위원장 지시를 의심 없이 따랐다”며 뒤늦게 후회했다.

셋째, 내로남불이다. 지난해 공관병 갑질 논란을 빚은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은 즉각 전역지원서를 냈지만 국방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징계 회피용 사퇴’라며 보직도 해임하지 않고 수사를 받게 했다. 아들 빨래 시키기 등 ‘갑질죄’로 수사가 시작됐지만 형사처벌 사안이 안 되자 760만원어치 향응을 받았다며 뇌물죄로 별건 구속했다. 두 달 전 판결에선 184만원어치만 뇌물로 인정돼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원안위원장이 감추려던 돈은 674만원이다. 공문서 위조와 국회 위증까지, 지금까지 드러난 그의 죄는 훨씬 크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기다렸다는 듯 당일 아침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나마 이런 사실이 뒤늦게라도 밝혀진 건 다행이다. 관련기관의 누군가가 야당에 제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슬 퍼런 권력 아래서도 공직의 ‘양심과 정의’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런 걸 권력 누수라며 범인 색출에 나서는 일만은 없길 바란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