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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대의 오래된 아파트 재발견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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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이 예정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 [사진 KT&G 상상마당]

재건축이 예정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 [사진 KT&G 상상마당]

성냥갑이나 흉물이란 꼬리표가 익숙했던 콘크리트 아파트를 새롭게 바라본 다큐멘터리‧전시‧도서 등이 잇따라 나온다. 달라진 시선의 중심에는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른바 ‘아파트 키드’가 있다. 아파트를 “고향”이라 부르는 이들의 시각은 아파트라면 투기‧투자부터 떠올리는 인식을 조심스레 뒤집는다.

아파트 '고향'이라는 2030 '아파트 키드'

새로 나온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감독 라야, 10월 25일 개봉)은 80년 세워져 지난해 재건축이 확정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 주민들이 길게는 3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을 되돌아본 회고록이다. 이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36)씨가 재건축 논의가 한창이던 2013년부터 편집장을 맡아 펴낸 독립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토대다. 다섯 권이 이어져 대부분 소셜펀딩 등을 통해 ‘완판’됐다. “사라지게 될 고향을 어딘가에 옮겨두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는 이 편집장은 “사랑하는 할머니의 영정사진 찍는 것 같은 마음으로 기록을 시작했는데 많은 분이 공감해주셨다.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상실의 대상이 집인데, 이에 대해 다 같이 애도하거나 얘기를 나누려는 시도는 정작 없었단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집의 시간들'엔 둔촌주공아파트 8가구 주민 13명의 인터뷰와 집 안팎의 모습이 담겼다. [사진 KT&G 상상마당]

'집의 시간들'엔 둔촌주공아파트 8가구 주민 13명의 인터뷰와 집 안팎의 모습이 담겼다. [사진 KT&G 상상마당]

이번 영화는 ‘가정방문’이란 프로젝트로 주거 공간의 풍경을 영상에 담아온 라야(29) 감독이 이인규 편집장과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아파트 게시판과 소셜미디어에 ‘당신의 집을 기록해드립니다’란 공고를 내 참여신청을 받았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완성된 영화는 형식부터 독특하다. 얼굴이나 이름은 드러내지 않고 여덟 가구 13인의 추억담을 저마다의 목소리, 집 안팎의 영상으로만 담았다. “공간이 주는 인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야 감독)다. 할머니가 틈만 나면 닦아 반들반들한 마루부터 딸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낡은 화장대, 아이들 키를 표시한 흔적까지 집집이 머금은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름드리나무와 오솔길이 동과 동 사이를 널찍하게 잇는 오래된 아파트만의 풍경도 있다. 여름철 단수와 녹물, 난방문제처럼 살아봐야 아는 해묵은 불만도 스스럼없이 들려준다. 자연스레 스며드는 생활소음과 햇살의 생생한 움직임을 보노라면, 이주와 철거가 진행돼 현재는 사라져버린 이 공간에 언제고 다시 가볼 수 있을 듯한 기분마저 든다.

동과 동 사이에 널찍하게 우거진 녹음과 오솔길은 주민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풍경이다. [사진 KT&G 상상마당]

동과 동 사이에 널찍하게 우거진 녹음과 오솔길은 주민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풍경이다. [사진 KT&G 상상마당]

재건축 아파트 기록 "감성팔이 아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감성팔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미화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이미 재건축이 결정됐잖아요. 살면서 불편했을 수 있고 그런 부분이 또 좋은 점들 때문에 상쇄되기도 하고요. 사라지기 직전의 둔촌주공아파트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이인규 편집장의 말이다.
라야 감독은 “부모님 세대는 주택이 집이지, 어떻게 아파트가 고향이냐. 답답하다, 천편일률적이라 하시는데, 같은 아파트도 누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매력이 다르다”며 “아파트도 생활 공간인데 부동산 투기 같은 얘기만 나오는 게 아쉽던 차에 ‘집의 시간들’ 프로젝트가 반가웠다”고 했다. 이번 작업을 하며 주민들이 부러웠던 순간도 털어놨다. “이토록 사랑하는 집이 있고 거기 태어나 쭉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살면서 이사를 여러 번 했거든요. 제가 만난 20~30대 중엔 사는 장소에 애착이 있으면서도 평생의 집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앞으론 또 어디 사나 고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왜 우리에겐 그런 ‘집’이 없는가, 생각하다 그에 대한 답처럼 엔딩을 배치했죠.”
영화 말미에 둔촌주공아파트의 한 토박이 주민은 “엄마가 고향보다 여기 더 오래 사셨는데 이제는 여기가 고향 같다고 한 것처럼 저도 여기서 태어나 자랐지만 (재건축으로 아파트를 떠나) 새로운 고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렘도 있다”고 말한다. 라야 감독은 “고향 같은 집을 아직 못 만났거나, 애정어린 집을 떠나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말”이라고 했다.

이 아파트, 사진 아니고 그림입니다

홍성우 작가의 아파트 그림책 『APARTMENTS』에 수록된 그림. 3D 프로그램으로 아파트의 외형을 모델링한 뒤 조명을 세팅해,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파트의 모습을 담았다. 이후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통해 색, 명암 등의 보정을 거쳐 마무리했다. [사진 홍성우]

홍성우 작가의 아파트 그림책 『APARTMENTS』에 수록된 그림. 3D 프로그램으로 아파트의 외형을 모델링한 뒤 조명을 세팅해,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파트의 모습을 담았다. 이후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통해 색, 명암 등의 보정을 거쳐 마무리했다. [사진 홍성우]

아파트에 영감을 받는 젊은 예술가들도 있다. 10월 중순 열린 서울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10’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홍성우(33) 작가가 아파트를 재조명한 그림책 『APARTMENTS』가 주목을 받았다. 20년가량을 안양과 서울, 부천 등 여러 곳의 아파트에서 살아온 그는 어느 날 문득 오래된 아파트에 시선을 사로잡혔다고 한다. “제가 지금 사는 곳처럼 20년 이상 된 아파트들은 대체로 외형이 화려하지 않고 무던하죠. '두부' 같단 표현을 자주 쓰는데 노을이 지면 노을빛이,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빛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아파트에 해가 들 때면 때때로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절벽이나 계곡 같은 풍경을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

홍성우 작가의 아파트 그림. 빛을 강하게 처리해, 아파트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부분인 발코니의 디테일을 강조했다. [사진 홍성우]

홍성우 작가의 아파트 그림. 빛을 강하게 처리해, 아파트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부분인 발코니의 디테일을 강조했다. [사진 홍성우]

책에 실린 여러 아파트 이미지는 빛을 섬세하게 표현해 언뜻 사진 같지만 3D 그래픽으로 제작한 그림이다. 지역이나 아파트 브랜드는 표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분들은 은마아파트 아니냐고 물으시던데, 오래된 아파트가 가진 조형적 요소에 끌렸기 때문에 지역적 맥락이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아 덜어냈다”고 했다. “아파트를 그린다는 걸 신기해하거나, 자신은 아파트를 흉물스럽게 여겼는데 제 작업은 정반대라 재밌다는 분도 계셨다”며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메시지를 전하려던 작업은 아니지만, 여러 반응이 기뻤다. 같은 대상에 대해 다양한 관점이 생긴다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오래된 아파트가 예술의 일부로…

재건축이 예정된 서울 조원동 강남아파트에선 지난 4~5월 젊은 예술가 10인이 전시회를 열었다. 74년 준공된 한국 1세대 아파트로, 오랜 분쟁 속에 20년 가까이 대부분 빈집인 채로 방치돼온 곳이다. 난방용 구리선을 도굴해가느라 바닥이 다 파헤쳐진 방, 미처 챙겨가지 못한 가재도구, 콘크리트 조각 등 텅 빈 아파트에서 포착한 삶의 흔적과 잔존물이 예술의 일부가 됐다. 평생 이 동네에 살며 아파트의 변화상을 지켜본 이상용 작가 등이 중심이 됐다.

강남아파트 전시 작품. 오제성, 광기의 시공간-시간의 침묵, 단채널 비디오, 11’01, 2018. [사진 고정균]

강남아파트 전시 작품. 오제성, 광기의 시공간-시간의 침묵, 단채널 비디오, 11’01, 2018. [사진 고정균]

전시 기획을 맡은 박지형 큐레이터에 따르면 참여 예술가는 모두 80~90년대생. 이들은 아파트를 어떤 의미로 바라봤을까. 박 큐레이터는 “제겐 당연한 삶의 공간이지만, 재개발아파트에 살아본 작가들은 '생존'을 먼저 떠올렸다. 오르는 월세에 떠밀려 다니는 이들은 자신을 밖으로 밀어내는 애증의 공간으로 인식했다”며 “작가마다 아파트에 얽힌 개인적인 기억을 토대로 각자 다른 의미를 찾아냈다”고 돌이켰다. 이는 요즘 젊은 세대가 아파트에 시선을 돌린 까닭과도 연결된다.

2030세대 왜 아파트 주목할까

통계청에 따르면 아파트는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주거형태의 60%를 넘어섰다. 그만큼 자연스런 삶의 풍경이 됐다.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아파트와 함께 성장한 세대가 아파트에 관심을 갖는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특히 주목받는 건 준공된 지 20~30년 넘은 오래된 아파트.‘아파트 덕후’를 자처하는 트위터리언 CDAPT, 과천 아파트 단지를 인스타그램에 기록하는 ‘과천기로커’등 늘 곁에 있어온 이 친근한 풍경을 소셜미디어로 수집‧공유하는 이들도 생겼다.

지금은 사라진 둔촌주공아파트. 1층 현관 밖으로 녹음이 무성하게 우거져있다. [사진 KT&G 상상마당]

지금은 사라진 둔촌주공아파트. 1층 현관 밖으로 녹음이 무성하게 우거져있다. [사진 KT&G 상상마당]

이인규 편집장은 오래된 아파트를 향한 애착의 또 다른 이유로 ‘녹지’를 들었다. “과천‧고덕‧개포 주공아파트에도 저희랑 비슷하게 기록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 아파트들이 지어진 70년대 말, 80년대만 해도 용적률(대지면적에 대한 건축 각층의 면적을 합계한 연면적)이 지금과 달랐고, 동과 동 사이에 공원 같은 여백이 있어 숨통을 틔워줬죠. 나무가 정말 많았어요. 다른 곳에 살아보니 도심에서 이렇게 자연을 벗하는 주거 환경이 흔치 않다는 걸 알게 됐죠. 아파트 대단지도 90년대부터는 녹지가 건물 앞에 띠처럼 얇게 둘러쳐지고, 지하주차장이 생기면서 나무도 깊게 못 자라게 됐죠. 1인 가구가 많은 빌라촌엔 그런 녹지마저 없어요. 당장은 어렵더라도 좀 더 인간다운 주거환경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혜택처럼 누렸던 좋은 환경들을 기록으로 남겨두면 언젠가 인구절벽 등의 문제로 지금과 다른 삶을 기획해야 할 때 참고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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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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