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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냉면외교의 반전(反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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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요리 외교(Food·Culinary diplomacy)’란 말이 있다. ‘위(胃)’를 뜻하는 Gastro를 붙여 Gastrodiplomacy라고도 한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현란한 음식과 포도주는 협상 상대나 타 국민의 마음을 사는 수단이고, 기밀을 캐내는 ‘병기’였다. 상대방의 혀를 녹여서 한 일이다. “훌륭한 요리사를 보내주면 나는 훌륭한 조약들을 당신에게 선물하겠다.” 혁명기 프랑스의 전략가 탈레랑 페리고르가 나폴레옹에게 했다는 이 말은 현대 공공외교의 한 축, ‘요리 외교’를 논할 때 종종 거론된다.

미국도 국무부 의전국 주도로 ‘셰프 군단(America Chef Corps)’을 두면서까지 음식을 공공외교에 활용한다. 북한 외교에서도 십분 활용했다. 지난 6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싱가포르 회담 때도 ‘오이선’ 같은 한국 음식으로 ‘존중’의 메시지를 던졌다. 2000년 10월 조명록 북한 차수가 워싱턴을 찾았을 때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국무부 8층 제퍼슨 홀에서 만찬을 베풀었는데, 테이블마다 김치가 올려졌다고 한다(양성철 전 주미대사 회고).

남북 사이엔 ‘누들(noodle) 디플로머시’가 회자했다. 지난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때다. 북한 요원들은 북측 통일각에 가져다 놓은 제면기에서 막 뽑아 삶은 면을 회담장으로 뛰어날랐다.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렵사리 평양에서 가져왔다. 멀리 온…,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 좀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는 말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평양냉면이 ‘평화의 상징’처럼 부각됐고, CNN 등은 김정은의 ‘누들 디플로머시’라고 평가했다.

지난달 평양 정상회담에서도 평양냉면은 남북 간 다리 역할을 했다. 우리 측 인사 160명이 평양냉면의 본산인 옥류관에 초대됐다. 청와대는 ‘부름을 받고’ 문재인 대통령을 특별수행한 대기업 총수들을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한 테이블에 앉혔다. 당시 방송 화면을 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은 묵묵히 냉면만 먹고 있었다. 멀리서 이를 본 남측 풀기자는 “대기업 총수들도 냉면을 먹느라 집중하는 모습”이라고 묘사했다.

이 자리에서 이선권이 총수들에게 남북 경협을 재촉하며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며 면박을 줬다는 게 드러났다. 평양냉면은 면을 잘라놓지 않아 먹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대기업 총수들이 냉면 그릇에 눈을 박고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많았던 거다. 북한과 남한이 갑과 을로 비친 기묘한 식사 자리. 왜곡된 남북관계의 단면을 보여준 건 역설적으로 평양냉면이다.

김수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