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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강제징용 판결의 외교적 파장에 현명하게 대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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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1억원씩(지연손해금은 별도)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강제 노역에 청춘을 바쳤거나 혹사와 전쟁에 희생된 피해자 및 유족이 위자료를 받을 길이 열렸다. 이 재판은 피해자 네 명에게 국한된 것이지만 대법원 결정인 만큼 한국 법원에 계류돼 있는 10여 건의 유사 소송도 비슷한 결론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적 배상 절차를 밟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의 소송이 봇물을 이룰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번 재판의 피고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은 판결 직후 승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국제법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며 이 판결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앞으로 한·일 관계는 최악의 국면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대법원 “청구권 협정에 강제 동원 피해 포함 안 돼” #한·일 정부는 신중한 대처로 외교적 파국을 막아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다수 의견은 “손해배상 청구권은 불법 식민 지배 및 침략 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한 것으로 강제 동원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청구권 협정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1965년에 이 협정을 체결할 때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견해에 이론의 여지는 있다. 대법관 두 명이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대법관 전원이 참여한 한국 법원의 결정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다.

한국 정부에 신고된 강제 동원 피해 사례는 22만 건이 넘는다. 한국 정부가 근거 자료를 통해 인정한 피해자는 7만여 명이다. 중국과 북한에도 피해자가 있다. 일본 측에서는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 법원 판결을 수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일본 측은 이 사건을 제3국이 개입하는 중재위원회(한일협정에 명시된 분쟁 조정 기구)를 통해 해결하자고 요구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갈 수 있다. 그럴 경우 최소 수년간 지속될 분쟁이 된다.

한·일 양국은 갈등이 어디까지로 확대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위안부 피해 합의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미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이 불법 식민 지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후 진정한 사과의 자세를 취하지 않아 이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이번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협정들의 파기와 같은 감정적 대응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 역시 한일협정 체결 당시 개별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모호한 협정을 맺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두 나라 모두 미래를 봐야 한다. 경제·국제정치·안보 면에서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이웃 나라다. 두 나라 정부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의 실질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외교적 파국의 길로 접어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