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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구 2500만, 해외 동원된 피해자 150만…강제징용 수난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운데)와 유가족들이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대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운데)와 유가족들이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대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피해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이날 손해배상 판결을 내놓은 강제징용 피해 기간은 대략 1939년부터 1945년까지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나마 일자리 제공이라는 명분으로 '모집'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기업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농촌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거나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었다. 총독부는 지역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량을 정해줬고, 경찰이나 면장 등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 직접 나서 할당량을 채웠다.

전황이 불리해진 1944년부터는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동원했다.

이런 식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이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이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2500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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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된 이들의 생활은 혹독하고 비참했다. 사고로 숨지는 이들은 셀 수도 없었고, 견디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생겼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도 이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을 귀국시키는 적극적인 수단을 마련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했던 강제징용자들도 밀항하거나 자체적으로 배편을 마련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 중 실종된 이들도 적지 않다.

고국에서도 녹록지 않은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정부로부터 주어진 보상은 미미했다.

1975~77년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망자 8552명에게 30만원씩 25억6500여만원을 지급했다. 2007년에는 군인·군속 공탁금 10만8900여건(총액 9100만엔), 2010년 노무자 공탁금 6만4200여건(총액 3500만엔)의 명단을 일본 정부에게서 받아, 한국 정부 재정으로 배상했다. 환산 비율은 1엔당 2000원.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위로금은 수십만~수백만원에 불과했다.

피해자 진상조사도 전체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4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위가 발족하면서 한국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장은희 기자 jang.eunhe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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