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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징용’ 장기전, 우리는 준비돼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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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1. 지난 18일.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유네스코의 비정치화’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심사 과정을 일본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걸 두고 “비정치화를 위한 개혁”이라면서 어깨를 두드린 것이다.

‘비정치화’는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가 꺼내 든 명분이었다. “논란이 있는 사안은 당사국 간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며 등재를 막았다. “위안부는 매춘부다. 군에 의한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주장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이었다. 개혁안이 이대로 확정되면 앞으로 강대국이 반대할 경우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어려워진다.

#2. 이보다 이틀 앞선 16일 문재인 대통령 역시 아줄레 사무총장을 만났다. 문 대통령은 유네스코에 어떤 주문을 했을까.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씨름’의 남북 공동 세계문화유산 지정, 비무장지대(DMZ)의 자연생태보존지역 지정 등 남북문제를 대화 테이블에 올렸다.

아쉽게도 진행 중인 유네스코의 ‘개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백번 외교관이 뛰는 것보다 때로는 대통령의 한마디가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개혁’ 방향에 대한 입장이라도 전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전시 성폭력’이라는 국제 이슈로 다루겠다던 정부의 의지가 무색했다.

유네스코 사례는 일본의 집요한 외교전의 일부다. 일본은 2015년 난징대학살 자료가 등재되자 충격을 받은 뒤 전방위적 로비를 벌여왔다. 단순히 일본이 유네스코의 최대 돈줄이기 때문에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아니라는 얘기다.

걱정이 되는 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 때문이다. 원고 승소 판결이 나올 경우 일본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하며 국제적인 여론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정부가 응하지 않을 게 예상되는데도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검토하는 것 역시 국제 여론전을 위한 방편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파기 직전이라는 점도 일본 주장을 거들게 될 것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체결된 지 50년이 넘었다. 당시 우리 국민을 위한 배려가 미흡했고 배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사이 국제 인권 수준이 크게 높아졌는데, 50여 년 전 협정으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덮어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1년 전 사안에 대해서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정부가 장기전에 대비한 전략은 갖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길고도 집요한 외교전쟁이 이제 시작되는데 말이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