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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문재인 정권의 건망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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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소통과 합의 중시’. 지난해 11월, 정부는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이란 이름으로 거창한 대북 청사진을 내놨다. 이때 나온 5대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통일부는 당시 “국회 등 다양한 주체들의 참여와 소통을 제도화해 통일문제·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합의를 도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했던 대북정책 관련 소통 무시 #일방적 독주, 평화 프로세스 막아

그뿐이 아니었다. 지난해 5월, 이 정부의 정책 밑그림을 그렸던 국정기획위도 이렇게 역설했다. “(이제는) 통일문제를 놓고 국민이 같이 갈 수 있는 국민 대협약을 만들 때가 됐다”고.

한데 보라. 그랬던 정부가 요즘 어떤지. 지난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를 비준했다. “국회 동의가 없으니 위헌”이라는 야당의 반대 따위는 아랑곳없었다. 이게 소통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겠다고 약속한 정부의 모습인가. 1년도 안 돼 대국민 약속을 까먹은 모양이다.

그간 수많은 이가 대북정책에 관한 합의를 강조해 왔다. 2013년에는 여야,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명망가 66명이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통합선언문’을 발표했다. 정파를 뛰어넘는 공감대가 있어야 남남갈등을 막고,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실제로 보수·진보를 아우르는 합의 없이는 독일 통일도 불가능했다. 서독이라고 이념에 따른 정파가 없을 리 없었다. 보수적인 기민당은 동독이 망하기만 기다렸다. 사민당은 통일을 위해 최우선으로 동독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두 정당은 여론에 밀려 서로 통 큰 양보를 한다. 기민당은 동독과 수교한 나라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사민당은 ‘통일지상주의’와 ‘중립화 노선’을 버렸다. 서로 한발씩 다가가면서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독일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이 진보적 동방정책을 반대하다 1982년 총리 당선 후 이를 이어받은 것도 이런 합의 때문이었다.

이렇듯 소통과 양보는 평화 통일을 비롯한 모든 정책의 기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소통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단적인 예다. 그는 서울시장 시절 이룬 청계천 복원사업에 대해선 대체로 좋은 평을 듣는다. 이렇게 된 데는 소통이 큰 몫을 했다. 서울시는 청계천 변 상인들을 4200여 번이나 만나 의견을 듣고 반대파는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 취임 후 벌인 4대 강 사업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환경단체 등 반대론자를 무시한 게 결정적 화근이었다. 그토록 다른 목소리를 경청했던 그가 돌변한 건 무슨 까닭인가. 청계천의 성공에 취해 “너희가 뭘 알겠냐”는 오만에 빠진 탓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처럼 문 정부가 귀를 막은 채 독주하면 결과는 뻔하다. 제재 해제, 북한 인권 등 예민한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국론은 갈기갈기 찢길 거다.

더 치명적인 건 대북정책의 앞날이 불확실해지면서 평화 프로세스 자체를 방해할 거라는 사실이다. 현 정부는 3년 반 남은 임기 중 결판을 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 입장에서 보자. 다음에 누가 권력을 잡을지, 또 지금의 통일 정책이 계속될지도 모르면서 현 정부와 모든 걸 매듭지으려 할까.

결국 정부가 독주할수록 3년 반 뒤 정책 변화의 진폭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점에 생각이 미치면 북한은 주춤할 게 틀림없다. 정부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남북 교류에 속도를 내는 게 아니다. 하루빨리 다른 의견도 경청해 대북정책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 게 최우선이다. 무릇 정(正)·반(反)·합(合)의 이치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게 만물의 순리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