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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부패의 척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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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경북 예천 밀양 박씨 문중에는 장손이 수행할 임무가 있다. 대대로 일기(日記)를 쓰는 것. 19세기 백 년간 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쌀, 고구마, 고등어 가격이 연도별로 적힌 장부는 경제사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1830년 11월 쌀 1말 1냥, 고등어 한 손 1전, 이런 식이다. 가끔 마을의 대소사가 등장한다. “1894년 5월, 동비(東匪)가 읍내를 점령하다.” 동학도가 쳐들어와 진을 쳤다는 뜻이다.

민주 진영의 촛불이 1년 반 만에 #지대 추구하는 힘센 조직들의 #영토를 지키는 횃불이 되었다 #우리는 안다 부패의 척후를 #정의를 표방하나 사람만 바뀔 뿐 #정·관·공신단체의 이익동맹임을

특이한 항목이 눈에 띈다. ‘한양 방문 90냥’. 일 년 가계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어디에 썼을까? 인맥 관리 비용이다. 한양 사대부의 관심에서 벗어나면 출셋길이 막힌다. 종로통 육의전이 문전성시였던 이유다. 지방 특산물과 뇌물을 사대부에게 바치고 귀향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린다. 과거(科擧) 출제자 정보를 입수한다면 천 리 길도 발걸음이 가볍다. 과거 급제자 33명 중 10등 밖 합격자에게는 능참봉(9품)도 어림없는 현실에서 뇌물 100냥은 아깝지 않다. 이게 어디 밀양 박씨뿐이랴. 혹시 아들이 벼슬길에 나서면 비용을 뽑는데. 부패의 최전선, 척후(斥候)가 된다.

정파가 바뀌면 사대부의 판도가 변하고 상납의 방향도 달라진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치는 관직을 파는 직업’이라고 막스 베버가 일찍이 간파했다. 그게 사회정의를 위한 것인지, 사익인지가 관건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공기관 신임 기관장 199명 중 94명이 낙하산 인사란다. 정권의 영(令)을 세우려면 불가피한 조치일 터. 이들의 행동거지가 ‘부패의 척후’인지, ‘부패의 척결’인지가 더 중요하다. 공공부문에서 고용을 둘러싼 각종 비리와 잡음이 터지는 것을 보면 정권 풍향에 민감한 기관장들이 대의(大義)보다 정파 담합 혹은 부패 방조에 나섰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조선 시대 이래 관직은 부패의 척후였다.

부패의 척후가 눈독을 들이는 대상은 성장률에 따라 변화한다. 고성장 시대에는 인허가 권력이 단연 척후의 독점물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면 고위직 곳간에 금은보화가 쌓인다. 성장률이 잦아드는 시간대에는 현장 실무자 간 교섭이 부패의 발생지다. 접대 문화가 전방위로 확산된다. 감사원, 국세청, 여타 민정 기관의 감시망이 활발해진다. 이것도 잠시, 저성장 지대로 접어들면 일자리가 대상이다. 고용세습과 채용 비리가 은밀히, 산발적으로 발생한다.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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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멋진 정책을 마구 밀어붙일 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 몰랐을까. 일 년 반 사이 공공부문 정규직 성문을 통과한 8만5000명 행렬에 친인척 한 뭉텅이가 슬쩍 묻어 들었다. 선도기업인 인천공항공사는 성곽 진입 예정자 9785명을 위해 공채 문호를 거의 폐쇄했다. 민노총은 자회사 비정규직 신분증을 소지한 사람만 가려 들이기로 사측과 담합했다. 눈치 빠른 기관장과 힘센 노조가 수비하는 성곽은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카프카의 성(城)이다. 주인공 K처럼 주변을 맴도는 청년들이 안쓰러웠는지 정권은 맞춤형 일자리 5만9000개를 발표했다. 독거노인 전수조사, 빈 강의실 불 끄기, 화재 감시원 등등 이름도 다채로운 정부 창출 일자리는, 비유하자면 성곽 수리하기, 오물 치우기, 땔감 줍기 같은 것들이다.

조선 시대에도 부패를 감시하는 민정 조직이 작동했다. 암행어사와 향청. 청렴결백의 대명사인 암행어사는 관청의 접대를 피해 말린 밥을 휴대했으나 종종 매수의 대상이 되었다. 관권을 견제하는 지방 양반 조직인 향청도 관청과 결탁하면 방법이 없었다. 조선 후기 부세제도가 마을 총액제로 바뀌자 향청은 신흥부농과 서민에게 세금을 전가했다. 1870년대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약탈 국가, ‘강자의 놀이터’에 백성의 촛불이 켜진 것이다.

‘이게 나라냐?’ 분노한 백성이 촛불을 켜 든 게 불과 일 년 십개월 전이다. 정권은 청와대에 입성하자 임옥상 화백의 대형 작품인 ‘촛불’을 걸었다. 촛불은 민주투사들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다. 그런데 그 촛불은 지대를 추구하는 힘센 조직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횃불이 되었다. 정규직으로 전환한 행운아들은 횃불에 환호하고, 성곽 수비대들은 ‘퇴직금 누진제’라는 기상천외의 선물로 답한다. 잃어버린 임금 찾아주기다. 2020년까지 정규직 전환 20만 명, 공채의 문은 닫히고, 기업은 부채에 허덕이고, 세금은 신흥부자들 몫이다. 종부세, 종소세, 건강보험료로 추렴한 수십조 세금이 성민에게 투하된다.

파당 국가, 약탈 국가의 성문을 수호하는 조직들은 언제나 정의를 표방했다. 우리는 안다. 부패의 척후는 사람만 바뀔 뿐 ‘정권’, 권력에 민감한 ‘관(官)’, 그리고 각종 ‘공신단체’들의 삼각동맹이라는 사실을. 현 정권이 외친 ‘정의’는 강 건너 등불, 아니 화폭 속 촛불일 뿐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