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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 해외여행 예산 800만원, 2명이 쓰고도 남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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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1)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 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 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 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편집자>

체코 프라하 Tyl 광장의 작은 노천시장. 채소같은 간단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사진 박헌정]

체코 프라하 Tyl 광장의 작은 노천시장. 채소같은 간단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사진 박헌정]

은퇴하면 일 년에 한 달씩은 해외에서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재작년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둘째 녀석 수험생 뒷바라지하느라 건너뛰고 올해가 그 두 번 째다. 명분은 나의 ‘만 50세 기념 여행’, 지역은 체코와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까지 다섯 나라다.

틈틈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았고,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준우승을 같이 기뻐하기도 했다. 특별히 시간과 비용을 할애하지 않아도 모든 준비가 순조로웠다. 그런데 주변 지인들에게 여행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작은 난관에 부딪히곤 했다. 나름대로 의미를 잘 설명해보려 했지만 대화 도중에 상대방의 부러움을 유발하거나 표정을 새초롬하게 만든 것은 아마도 해외여행이 내포하는 경제적 측면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대개 돈이 많이 들 거라 생각한다. 7박 9일 패키지도 1인당 최소 200만~300만원이고 현지에서 추가되는 돈도 만만찮다. 그런데 우리의 총예산은 5주 동안 800만원이다. 충분하다. 남을 것 같다. 항공료(180만원), 렌터카(55만원), 그리고 숙박과 식사, 시내교통비, 커피값, 보험 같은, 현관문을 나섰다 들어올 때까지 들어가는 모든 비용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Dolac 시장. 값을 깎아주거나 물건을 듬뿍 담아주는 인심이 남아있다. [사진 박헌정]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Dolac 시장. 값을 깎아주거나 물건을 듬뿍 담아주는 인심이 남아있다. [사진 박헌정]

물가가 비싸지 않은 곳이기도 하려니와 관광이 아니라 해외생활에 방점을 두니 그렇다. 우리는 아파트를 빌려 지내고 앙증맞은 2인용 전기밥통 가져가서 시장에서 장 봐다가 밥해 먹으며 다닌다. 엊그제는 자그레브 시장에서 빙어를 3000원어치 사다가 빙어 튀김을 만들었고, 어제는 낙지 볶음을 해 먹었다.

SNS에 사진을 올렸더니 지인들은 거기까지 가서 튀김 만들 생각을 했냐며 재미있어한다. 이처럼 항공료만 제외하면 여기나 거기나 생활비 정도 들 뿐이다. 소형차를 한 대 빌리니 조용한 시 외곽으로 멀찌감치 나가서 저렴한 아파트를 빌릴 수 있었다. 거의 범죄 수준의 바가지가 판을 치는 도심 관광지에서 벗어나 동네 생활권에 잠입할 수 있을 듯하다. 여행의 목적은 오전에 동네 커피 가게에 앉아 햇볕 쬐기 위함이다.

나는 고정수입이 적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돈을 쓰면서 해외에서 체류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시간이 자유롭고, 둘째, 돈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렸기 때문이다. 돈은 행복해지기 위해 써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에 써야 하고, 전 인생에 있어 인상적인 경험을 하는 데 써야 하고, 죽는 순간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게 좋다. 그리고 큰돈과 좋은 결과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까지.

프라하의 전철 내부. 도시 간 이동은 렌트카로 하고 시내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경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사진 박헌정]

프라하의 전철 내부. 도시 간 이동은 렌트카로 하고 시내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경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사진 박헌정]

그래서 우리 집안에는 명품 근처에도 갈만한 물건이 없지만 여행에는 돈을 잘 쓴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1박 2일짜리 국내 여행이라도 가야 한다. 아내와 바닷가 횟집에서 3만~4만 원짜리 회 한 접시에 소주잔을 기울이지 않으면 온몸이 뒤틀린다.

회사를 그만둔 지 2년 되었다. 내가 회사를 일찍 그만둘 때 송별주를 사던 지인들은 "괜찮아? 왜 그래? 잘 될 거야. 자유인이시네. 부럽다..." 등등 여러 말을 해댔지만 나는 그 말들의 의미가 "넌 돈이 얼마나 있길래 객기를 부리냐? 대체 '얼마'냐?"하는 궁금증임을 눈치챘다.

반대로 내 물음은 돈이 얼마 있으면 안심하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가였다. 일부 재벌처럼 검찰이니 구치소니 들락거릴 거면 나는 진작에 회사를 그만두었겠다. 그들은 돈이 부족해서 계속 붙잡고 있을까.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광장. 관광객 대상의 카페와 달리 현지 노인들이 차지한 저렴하고 시끌벅적한 카페다. [사진 박헌정]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광장. 관광객 대상의 카페와 달리 현지 노인들이 차지한 저렴하고 시끌벅적한 카페다. [사진 박헌정]

지난해까지 목동에서 4억5000만 원짜리 전세를 살면서 월세도 매달 70만원씩 냈다. 우리 뒤를 이어 새로 들어온 세입자는 110만원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좋은 대학교에 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값’이 그만큼이다. 올해 다른 지역의 30평대 아파트로 옮기니 월세와 관리비 차액만 해도 1년에 1000만원에 가깝다. 그만큼의 돈을 보금자리에 깔고 있는 셈이니 내게 서울살이는 고단함을 넘어 살벌함까지 느껴진다.

따져보면 그다지 뭘 호사한 기억도 없는데 엄청나게 깔고 앉아 있다. 아파트 지하에 고이 모셔둔 중형 자동차의 몸값과 유지비용이 1년에 800만원이다. 12개월로 나누면 한 달에 70만원, 이번 여행에서 차를 렌트하는 비용보다 크다. 회사 다닐 때는 구두 닦는 값도 1년에 25만원, 요즘 같으면 내게 나이키 이월상품이 세 켤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는 자전거 도시라고 부를만큼 도로나 이용 질서같은 문화가 발달했다. [사진 박헌정]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는 자전거 도시라고 부를만큼 도로나 이용 질서같은 문화가 발달했다. [사진 박헌정]

오후 시간에 부하직원들이 사다리 타서 복불복으로 들이밀던 피자 같은 간식비 추렴도 번번이 1만~2만원씩 나갔고, 먹을 시간도 없어 책상 구석에 미지근하게 놔뒀다가 두어개씩 모아서 집에 가져가던 배달 우윳값도 한 달에 10만원이었다. 월급쟁이는 큰 체다. 큰 덩어리만 남고 작은 가루는 빠져서 술술 떨어진다.

현직에 있을 때는 돈의 개념이 다른 세상에 산 것이었다. 당장 벌고 있으니 수익을 위한 손비처리 개념마저 회사 회계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돈을 벌지 않으니 돈 말고도 세상에는 경험하고 느껴보고 고민해야 할 게 정말 많음을 깨닫게 된다.

이건 배불러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할 게 지천으로 널려있다고 생각하면 그깟 비싼 집, 비싼 차가 대수랴, 이것이 내가 돈에 끌려다니지 않고 돈을 ‘부려가며’ 배짱부리는 이유다.

박헌정 수필가 portugal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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