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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녀가 쓴 민영환의 최후 “목숨 바친 내면이 궁금했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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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증조할아버지 민영환의 고뇌를 그린 장편 『죽지 않는 혼』을 쓴 민명기씨. [임현동 기자]

증조할아버지 민영환의 고뇌를 그린 장편 『죽지 않는 혼』을 쓴 민명기씨. [임현동 기자]

충정공(忠正公) 민영환(1861~1905)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철회를 요구하던 그가 자결하자 좌의정을 지낸 조병세 등 여러 사람이 따라 죽었다고 역사 기록은 전한다. 유럽·미국 등의 선진 제도를 받아들여야 나라가 산다는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동학농민운동 세력으로부터 처단해야 할 기득권층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고종의 사촌 동생이자 명성 황후의 먼 친척으로, 승승장구하던 척신(戚臣) 중 한 명이었다는 점이 작용한 듯하다.

『죽지 않는 혼』의 소설가 민명기 #“집안 사람이라 더 조심스레 접근”

지난해 장편소설 『하린』을 써서 소설가로 데뷔한 민명기(73)씨는 민영환의 다음과 같은 점이 궁금했다고 한다. “아무런 부러울 게 없는 40대 중반의 유력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다고 했을 때 그 마음 속에 일어났던 열망이나 갈등은 어떤 것이었을까.”

물론 사심 없는 궁금증이 민씨가 민영환의 최후를 다룬 새 장편 『죽지 않는 혼』(중앙북스)을 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민씨는 민영환의 증손녀다. 24일 인터뷰에서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의 제사를 모실 뻔했다”고 밝혔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증조할아버지의 자결의 진실이 성장하면서 차츰 궁금해졌다고 했다.

원래는 민씨 자신의 어머니를 소재로 한 『하린』 보다 민영환 얘기를 먼저 쓰고 싶었다. 막상 쓰려고 하니 역사공부를 더해야 했고, 사실 관계를 확인할 것도 많았다. “내 집안 분이라고 해서 무조건 훌륭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은 악하게 그릴 수는 없는 거고,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민씨는 “민영환이 여러 차례 외국에 나가다 보니 당시 조선이 얼마나 뒤처져 있고 잘못돼 있는지 절감하게 됐고, 한 사람의 힘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마치 개미가 태산을 지고 가는 것 같은 무거운 책임감과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고 했다.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 일제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해 러시아·영국 등을 다녀온 그의 내면이 그랬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자결 이유에 대해 “20년 넘게 정치의 중심에 있었는데도 결국 나라를 결딴나게 했다는 죄책감, 조금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절망감에 죽음을 선택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울분에 찬 감정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 던질 충격을 예측하고 철저한 계산 끝에 결행한 이성적인 죽음이었다”고 했다.

민씨는 “동학난이 발생했던 시점만 해도 민영환은 왕정만이 유일한 정치제도라는 생각을 가졌던 굉장한 왕당파였던 것 같다”고 했다. 뿌리 깊은 유교 사상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대통령’이란 용어조차 없을 때 미국에 가서 조선의 왕과 같은 프레지던트를 백성이 뽑는 장면을 목격하고 서양 제도를 지지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민씨는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병조판서였던 아버지 민겸호가 성난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일을 겪은 아들 민영환의 내면을 이렇게 그렸다.

“영환은 그 임오년의 군란을 통해 배고픈 백성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았다 (…)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을 바라보는 백성의 원망이 얼마나 두려운지도 알게 되었다.”(97쪽)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 내면 복원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승만(1875~1965)과 관련된 대목은 남편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조언을 참고했다고 했다. 초고에선 긍정 일변도였으나 “비판할 건 비판해야 한다”는 남편의 얘기를 받아들여 이승만이 상당한 고집불통이었다는 부분을 소설 뒷부분에 추가했다.

1년 여 만에 새 장편을 썼다고 언급하자 민씨는 “소설 쓰는 게 무척 재미있다. 물 마시러 방 밖으로 나가기도 싫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첫 소설을 내자 나이 들어 장편을 썼다는 점을 모두 놀라워하고 첫 작품인데도 부드럽게 읽힌다는 식의 호평이 많아 두 번째 소설을 쓸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를 너무 모른다”며 “조금 쉬었다가 마음이 내키면 당시 정치무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입장과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 두 번째 민영환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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