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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인가 ‘선진 심문’인가 … 뜨거운 이름 전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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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호 32면

책 속으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맨스플레이닝(mansplaining)’은 남자(man)와 설명하기(splaining=explaining의 방언)의 합성어다. ‘남자의 설명질’로 옮길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의 무지를 전제하고 잘난척하며 여성에게 설명하려 든다는 뜻. 작가·역사가·사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57)이 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는, 1960년대에 처음 나온 이 말을 일상 용어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는 트럼프·기후변화·노숙자·사형제 등 다양한 미국의 문제를 다뤘다. 원제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라’이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신(神)이 인간에게 다른 창조물에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줬다는 『창세기』의 주장은 이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름에 대한 회의도 있다. 『도덕경』은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셰익스피어는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 장미를 달리 불러도 향기는 같을 게 아닌가”라고 했다.

조지 오웰(1903~1950)의 입상. 오웰은 언어의 현실 왜곡 가능성을 경고했다. [사진 벤 서덜랜드]

조지 오웰(1903~1950)의 입상. 오웰은 언어의 현실 왜곡 가능성을 경고했다. [사진 벤 서덜랜드]

저자는 미국이 내전 중이라고 파악한다. 핵심은 ‘이름 전쟁’이다. 트럼프는 ‘가족 상봉’을 ‘연쇄 이주’로, 조지 W 부시는 ‘고문’을 ‘선진 심문’이라 불렀다. 저자는 미국의 위기가 언어의 위기이며 위기 탈출의 시작 또한 정확한 언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름은 억압의 도구이자 해방의 도구라는 것.

한글판 서문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7년 늦여름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용감한 페미니스트들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지만, 그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죠.” “그동안 몇몇 영웅적인 한국인들의 활동을 감탄하며 지켜봐 왔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들이 배상과 인정을 요구하며 싸우는 모습을 봐왔고,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때 농민 이경해 씨가 항의의 자살로 세계에 충격을 안겼던 일을 기억합니다(그래서 ‘우리는 모두 이(李)다(Todos somos Lee)’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죠.” 솔닛은 우리에겐 잊혀진 이름 이경해(李京海, 1947~2003)를 생생히 기억한다.

저자는 “분노가 때로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눈멀게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분노에 차 있다. 미국이 “11초마다 한명씩 여성이 구타당하는 나라”라는 것,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한 여성의 75%가 보복에 시달렸다”는 현실에 분노한다.

우리도 미국처럼 ‘이름 전쟁’ 중이다. 사태냐 민주화운동이냐, 쿠데타냐 혁명이냐, 해상교통사고냐 국가가 잘못한 재난이냐…. 동병상련을 느끼게 하는 책.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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