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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사유화의 유령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7호 35면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소위 근대에 이르기 전, 주체를 지배한 것은 집단성 그리고 공공성이었다. 사람들은 관계적 삶에 익숙해 있었고,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시각에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았다. 먼 옛날의 멍석말이와 같은 징벌은 공동체의 암묵적인 합의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체들은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훼손하는 사람들은 집단의 배척을 당했다. 동일성의 논리가 항상 개별성의 논리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개인들에게 이와 같은 공공성은 구속이고 속박이었다. 근대-주체들은 목숨을 건 부르주아 혁명들을 통해 사적 자유의 공간을 쟁취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적’ 자유의 공간을 획득한 근대인들은 공동의 영역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개별 주체들이 의회민주주의에 모든 것을 떠넘기고 사적 공간으로 흩어질 때, 시스템은 더욱 효율적으로 개체들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개체들 사이의 유대와 연대가 차단될수록 자본과 권력의 지배가 훨씬 용이했기 때문이다. 사적 공간에 갇힌 개체들은 자신들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할 때 자본 기계와 권력 기계는 개체들을 체제의 편리한 ‘부품’으로 만든다.

삶의 향기 10/27

삶의 향기 10/27

문제는 개별화된 현대-주체들의 극도로 ‘사유화된’ 삶이다. 이들은 관계적 상상력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사적인’ 패러다임으로 읽는다. 가령 이들에게 (철저하게) 사유화된 가정은 그 누구도 침범 못 할 공간이 된다. 그곳에서는 공공의 문법이 통용되지 않으며, 집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집 ‘밖’에서는 알 수 없게 된다. 가정 폭력이 점점 더 극단적으로 가고 있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가정은 공공의 문법이 끼어들 수 없는 ‘신성한(?)’ 공간이어서 오히려 가장 어두운 악의 공간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다. 그 누구도 이제 자기 담 너머 남의 집 일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전처 살해 사건은 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바깥’의 문법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혼한 후 전 남편으로부터 4년여 동안 지속적인 살해위협을 받아왔고, 여섯 번의 이사를 하며 피해 다녔던 여성은 결국 전 남편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접근금지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기껏해야 과태료 몇 푼을 내면 그것은 종잇장처럼 쉽게 찢어지는 법이었다. 실제로 육체적 상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도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법이 치고 들어갈 여지는 별로 없었다.

최근 전국의 ‘비리’ 유치원들이 보여주는 사태도 동일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비리 유치원의 운영자들은 유치원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정작 자신들은 다른 단위학교의 구성원들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는 공교육자들이면서, 자신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은 철저하게 ‘사적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데서 대부분의 문제들이 파생되었다. 지원과 혜택은 공공영역에서 받고, 이윤은 철저하게 사유화하는 것이 이들 비리 유치원 운영자들의 모순이다. 이런 정서는 바닥까지 사유화된 공공영역의 황폐한 풍경을 잘 보여준다. 최근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의 세습도 사유화된 상상력이 종교적 공공영역을 얼마나 비천하게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가정, 학교, 교회, 기업에 사적 소유의 유령이 출몰할 때 목숨을 걸고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쟁취했던 근대의 정신은 무참하게 무너진다.

봉건 시대의 집단성이 일정 단계에서 개인들에게 억압과 폭력으로 작용했다면, 이제 개체들은 공공성에서 너무 멀어지면서 스스로를 골방에 유폐시키고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쟁취한 사적 공간이 그것을 얻은 광장에서 멀어질 때, 가장 먼저 망가지는 것은 개별 주체들이다. 모든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관계적 상상력을 상실한 개체들이 사적 공간의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힐 때 각 개체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망가진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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