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떠나는 외국인 관장의 일침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607호 35면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연임이 되지 않아서 올해 연말에 떠나는 첫 외국인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를 얼마 전 인터뷰했다. 그는 여전히 신중하게, 그러나 전보다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고, 그것을 장문의 영문 기사로 코리아중앙데일리에 실었다.

첫 문답은 이것이었다. 문체부는 연임 불가를 통보하며 "국현은 한국미술 정체성 확립에 초점을 둬야 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외국인 관장은 그 일에 한계가 있으며, “한국미술 정체성”의 어떤 플라톤적 이데아(항구적 실재)가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에 대해 마리의 견해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정부 결정을 존중하지만, 한국인만이 한국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 말이다.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말하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많은 전시기획이 필요하며, 사실 일생이 걸려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미술은 다양한 예술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다만 한국미술의 독특한 점 하나는 한국사회와 한국문화가 겪은 압축된 변화(다른 나라에서 최소 300년 걸린 것이 100년 안에 일어났다)를 예술로 번역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압축적 변화의 빛과 그림자가 마리와의 인터뷰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한국 미술계의 특징으로, 옛 명화 감상에 치중하는 일본관람객과 달리 한국관람객은 새로운 미술을 즐기며, 탁월한 작가들이 여러 세대와 장르에 걸쳐 많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국공립 미술관 행정이 불연속적이고 근시안적인 것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미술관 소장품은 미술관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라서 오랜 리서치를 바탕으로 장기계획으로 진행돼야 하는데, “처음 국현에 왔을 때 그간 해마다 소장품 구입의 초점이 변해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밖에 국현의 여러 이슈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계속 입에 올린 단어는 “연속성(continuity)”과 “장기(long-term)”였다. 국현은 물론 한국의 공공기관, 행정부, 나아가 한국사회 자체가 결여하고 있는 문제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몇몇 유럽 미술기관의 제의를 받았다면서 마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한국과 아시아미술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앞으로도 한국미술을 세계적 맥락에서 연구하고 알리는 데 힘쓸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단기로 일하고 싶지 않다. 유럽의 미술기관장은 최소 5년 단위이고 대개 연임된다. 어떤 전문가들은 미술관장이 최고의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기가 7년차부터라고 한다.”

사실 그간 마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기에 한국인 학예연구사들과 한국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정부가 기대했던 한국미술의 국제적 홍보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이 있다. 반면에 한국미술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학연과 파벌 등에서 자유롭고 국제적 맥락에서 한국미술을 보는 시야를 지녔기에 고품질 전시를 만들어왔고 한국미술에 대한 영문 출판 등 기초를 잘 다졌다는 평도 있다.

최근에 만난 한 미술계 주요 인사는 “마리 관장이 일에 있어서 발동이 다소 늦게 걸렸고, 그건 한국 조직문화를 새로 파악해야 하는 외국인 관장으로서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 후에 활동은 주시할 만한 것이었고, 그 성과를 제대로 알려면 그가 몇 년 더 관장으로 있어야 하지 않았겠나”라고 말했다.

지금 국현 서울관에서는 윤형근 회고전과 최정화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정치적 박해의 고통을 동양 서예와 서양 추상화를 아우른 단색화로 승화시킨 윤형근의 작품과 알록달록 대량생산 일상용품을 토템과 작은 신전처럼 쌓아 올린 최정화의 작품들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한국미술의 복합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근 국현 과천관에서 시작한 대규모 국제사진전 ‘문명’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은 동시대 세계문명과의 ‘따로 또 같이’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정부 관료가 말한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과연 관련이 없을까? 더구나 국현이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을 하길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주 장기적이고 연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와 관련한 마리의 마지막 말은 요즘 말로 ‘뼈 때리는’ 말이었다. “국현에서 나처럼 3년 임기를 다 채운 사람마저 드물다고 들었다. 누가 후임이 되건 새 관장은 자유롭게 장기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