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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따라 은빛 억새 물결치는 영남알프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하만윤의 산 100배 즐기기(32) 

영축산으로 오르는 길에 펼친 거대한 억새 물결. [사진 하만윤]

영축산으로 오르는 길에 펼친 거대한 억새 물결. [사진 하만윤]

가을 산에는 단풍만 있는 게 아니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흐르며 널따란 평원을 은빛으로 뒤덮는 억새는 산 골골이 붉은 물을 들이는 단풍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영남알프스를 빼놓을 수 없다. 영남알프스는 가지산을 중심으로 울산과 양산, 밀양에 걸쳐 있는 해발 1천m 이상인 산들을 일컫는데, 수려한 풍경과 산세가 유럽 알프스에 비견한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 대개는 가지산(1,241m), 간월산(1,06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천황산(1,189m), 재약산(1,119m), 고현산(1,034m) 등을 지칭하나 운문산(1,195m), 문복산(1,15m)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저자는 혈기왕성한 20대에 천황산 사자평에 올라 330만여㎡의 억새 바다에 취한 적이 있다. 그때를 떠올리며 이번 산행은 배내고개에서 시작해 배내봉-간월산-신불산-영축산을 다녀오는 코스로 계획했다.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 간월재 33만여㎡에 억새가 무리 지어 있고,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 198만여㎡ 규모에 억새 무리가 또 있다고 하니 기대는 이미 하늘에 가 닿았다.

늘 그랬듯, 산행 전 일기예보를 먼저 챙긴다. 산행을 시작할 토요일 아침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예보가 있어 두툼한 옷가지를 더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할 때 맑던 하늘이 토요일 새벽, 목적지에 다다르자 잔뜩 흐려 있다. 억새 풍경은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햇빛이 쏟아질 때 그 운치와 멋이 배가될 터인데, 흐린 하늘이 내심 야속하다.

배내고개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한다. [사진 하만윤]

배내고개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한다. [사진 하만윤]

배내고개에 도착한 일행은 너나 할 것이 없이 분주히 새벽 산행 준비를 서두른다. 일기예보와 달리 예상보다 새벽바람이 차지 않아 다행이다. 배내고개에서 배내봉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찾아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나무계단이 일행을 먼저 맞이한다. 다른 몇몇 산악회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30여 분을 오르니 이내 배내봉에 다다른다.

선짐이질등 안내판.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다. [사진 하만윤]

선짐이질등 안내판.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다. [사진 하만윤]

배내봉에서 잠시 쉰 일행은 다시 두 번째 목적지인 간월산을 향해 출발한다. 산이 험하지 않으나 동이 틀 무렵은 어두워 서로의 움직임과 불빛에 의지해 길을 이어간다. 배내봉을 지나 조금 내려가니 선짐이질등 안내판이 나온다. 고개 이름이 재밌다 싶지만 ‘등짐을 진 채 서서 쉰다’는 의미라는 걸 알고 나면 마냥 웃을 수는 없다.

안내판에는 1980년대까지도 배내골 아낙들이 산줄기 반대편에 있는 언양장을 오갈 때 이 고개를 넘었다는 것과 배내골 주민들이 ‘일흔아홉 고개 선짐이질등을 오르면 하늘이 노랗더라’는 의미로 이른바 골병재로 불렀다고 적혀있다. 해발 900m의 재를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들고 삶의 무게만큼 오갔을 그들의 수고로움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왠지 숙연해진다.

흐린 하늘을 뚫고 해의 붉은 기운이 기어이 번진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사진 하만윤]

흐린 하늘을 뚫고 해의 붉은 기운이 기어이 번진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사진 하만윤]

선짐이질등을 지나 간월산 정상을 오르는 사이 동이 튼다. 잔뜩 낀 구름에 가려 화려한 일출을 만나진 못했으나 붉은 기운이 번지고 기어이 아침이 온다. 동이 트자 걷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간월산 정상에서 바라본 신불산. 산에서 피어오른 아침안개가 구름에 가닿았다. [사진 하만윤]

간월산 정상에서 바라본 신불산. 산에서 피어오른 아침안개가 구름에 가닿았다. [사진 하만윤]

간월산 정상에 다다르자 바람이 제법 쌀쌀해졌다. 정상에 오르는 동안 흐른 땀을 식히느라 잠깐 바람에 몸을 맡기다 이내 방풍의를 꺼내 입는다. 땀이 가시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저체온증으로 고생하지 않으려면 몸이 식기 전에 대비해야 한다.

정상에서 시선을 멀리 던지니 울산 앞바다에 구름 사이 붉은 햇살도 보인다. 맞은편 신불산은 아침 안개가 피어올라 어디까지 구름이고 어디까지 안개인지 모호하다. 그 나름의 운치를 눈에 담고 마음에 담으며 아침 식사를 위해 서둘러 간월재로 내려간다.

간월재로 내려가는 길. 신불산 억새평원이 눈앞에 펼친다. [사진 하만윤]

간월재로 내려가는 길. 신불산 억새평원이 눈앞에 펼친다. [사진 하만윤]

간월재로 내려가면 신불산 억새평원이 눈앞에 나타난다. 해발 900m 높이에 이처럼 탁 트인 평원이 있고 그 위에 빼곡히 자리 잡은 억새들이라니. 바람이 훑고 지나갈라치면 가녀린 몸들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연한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바쁘다. 금강산도 식후경은 뒷전이다. 이때만큼은 배고픔보다 멋진 풍경이 먼저였다.

나무가 그대로 화석이 된 규화목. [사진 하만윤]

나무가 그대로 화석이 된 규화목. [사진 하만윤]

간월재에는 억새만 있는 게 아니다. 간월산 정상에서 재로 내려가는 길에 나무 형태 및 구조 등이 그대로 굳어져 화석이 된 규화목이 있다. 우리나라 지질 다양성을 밝히는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한 것으로,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후기의 것으로 추정한단다.

백악기 말 무렵에 화산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자란 나무가 선 채로 화산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있다. 화석이 됐다고 한다. 돌이 된 채 1억 년을 버틴 나무라니. 자세히 보면 나이테가 제법 선명하다. 아름다운 억새 풍경에 빠져 무심코 지나칠 수 있으나 한 번은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간월재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신불산으로 향한다. 해가 높이 오를수록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비치며 억새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불산 정상에 서자 신불재와 영축산까지의 길이 한눈에 펼치며 탄성이 절로 나온다. 산에서 바다를 만났다는 표현이 괜한 게 아니다 싶을 정도다.

억새가 바다를 이루고 바람을 따라 은빛 물결이 파도가 되어 밀려가고 또 밀려온다. 억새 바다 한가운데로 난 나무 데크 탐방로가 마치 홍해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을 연상케 한다. 더욱이 그 사이사이 험준한 암벽들을 품은 산세는 억새군락이 만든 바다와는 또 다른 풍경을 선물한다.

억새군락이 만든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며 영축산을 오른다. [사진 7080산처럼]

억새군락이 만든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며 영축산을 오른다. [사진 7080산처럼]

신불재에서 하산키로 한 일행 몇을 먼저 내려보내고 나머지는 영축산 정상을 향해 다시 길을 서두른다. 그즈음 누가 다치기라도 한 것인지 신불재에 119 구조 헬기가 나타났다. 평소에는 산행하지 않다가 봄가을 단풍이나 억새 풍경을 보려고 무리하게 산에 오르는 분들이 간혹 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해 등산코스를 계획해야 하고, 설령 컨디션이 좋은 날이라고 해도 산에서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심해야 한다. 잠깐의 방심이 자칫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헬기에 탄 이가 누군지 알 수 없으나 크게 다친 게 아니길 진심으로 바랐다.

결코 반갑지 않은 119 구조 헬기. 산에서는 무리와 방심은 금물이다. [사진 하만윤]

결코 반갑지 않은 119 구조 헬기. 산에서는 무리와 방심은 금물이다. [사진 하만윤]

구름이 걷히며 햇빛에 더욱 반짝이는 억새 군락의 아름다움을 한껏 즐기며 ‘가을이 아니면 결코 만날 수 없을 장관’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다 문득, 이곳보다 더 광활한 맞은편 천황산 사자평원의 억새 풍경은 또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해답은 하나다. 올해 늦가을이든, 내년 가을이든 산행 리스트에 또다시 영남알프스를 넣으면 될 일이다.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간월재-신불산-신불재-영축산-선리마을. 총거리 약 15Km, 시간 약 6시간 30분. [사진 하만윤]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간월재-신불산-신불재-영축산-선리마을. 총거리 약 15Km, 시간 약 6시간 30분. [사진 하만윤]

하만윤 7080산처럼 산행대장 roadinm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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