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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벚꽃이 활짝…요즘 일본서 벌어진 놀라운 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성태원의 날씨이야기(31)

최근 이웃 나라 일본 곳곳에서 때아닌 벚꽃이 피어 소동 아닌 소동이 일어났다. 벚꽃은 주지하다시피 3~4월에 걸쳐 일본, 한국 등지에서 피는 대표적인 봄꽃이다. 봄꽃으로 개나리, 진달래도 꼽히지만, 벚꽃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벚꽃은 개화 일주일 후면 흰색 또는 연분홍색의 꽃을 만개하면서 사람들을 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10월 중순 이후 일본 전역에서 활짝 핀 벚꽃이 목격되고 있다. 일본과 세계 여러 나라 매체들이 일본 남쪽 규슈에서 북쪽 홋카이도에 이르는 곳곳에서 ‘가을 벚꽃’이 피고 있다는 사실을 잇달아 보도하고 나섰다. 일본 기상청이나 일본 유수의 기상업체 웨더뉴스 등에 수백 건의 개화 제보가 답지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일본 규슈 우레시노에 핀 10월 벚꽃. 최근 일본 규슈 일대를 여행했을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 성태원]

일본 규슈 우레시노에 핀 10월 벚꽃. 최근 일본 규슈 일대를 여행했을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 성태원]

최근 일본 규슈 일대를 여행했던 나도 지난 22일(월) ‘우레시노’라는 곳에서 벚꽃이 핀 것을 목격했다. 구름이 좀 끼었지만 아침 12℃, 낮 22℃ 정도로 가을치고는 푸근한 날씨였다. 아침을 먹고 우레시노 시내를 산보하던 중 뜻밖에도 어느 집 마당에서 벚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내 눈을 의심했다. 평생 봄 벚꽃만 보아 온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곳 주민인 듯 보이는 행인이 눈에 띄어 물어봤다. “이거 벚꽃 맞지요. 가을에 핀 거 보신 적 있나요?” 대답은 이랬다. “물론 벚꽃이다. 벚나무 천지인 일본에는 왕왕 가을에 벚꽃이 목격되기도 한다. 하지만 올해는 유별나다. 전국에 걸쳐 가을 벚꽃이 대규모로 핀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우레시노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제주도와 위도가 비슷한 우레시노에는 매년 3월 하순~4월 초순 벚꽃이 만발하고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런데 반년 정도 앞서 극히 일부 벚나무에서 벚꽃이 활짝 핀 것이다.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을 앞질러 피었으니 놀랍고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해석도 분분하다. 벚나무 생체시계에 고장이 났다느니, 계절을 잊었다느니, 이상 기후에 뜬금없어졌다느니, 10월에 철없이 피었다느니...

외신이 전한 이번 일본 가을 벚꽃 개화의 주요 원인은 잇단 태풍과 상대적으로 높았던 가을 기온이다. 기상 전문가들은 우선 지난 8, 9월 일본 열도를 강타한 ‘제비’ ‘짜미’ 등 태풍을 꼽고 있다.

제21호 태풍 제비가 일본 남서부 지역을 상륙한 지난 9월 4일 고치(高知)현 아키(安藝)시의 항구 앞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솟구쳐 오르고 있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 가을 벚꽃 개화의 주요 원인을 잇단 태풍과 상대적으로 높았던 가을 기온 때문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

제21호 태풍 제비가 일본 남서부 지역을 상륙한 지난 9월 4일 고치(高知)현 아키(安藝)시의 항구 앞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솟구쳐 오르고 있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 가을 벚꽃 개화의 주요 원인을 잇단 태풍과 상대적으로 높았던 가을 기온 때문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

대개 나뭇잎은 봄이 오기 전까지 개화를 막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하지만 위에 꼽은 태풍들이 몰고 온 강한 바람이 나뭇잎을 대거 떨어뜨리면서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겼고 그 결과 꽃봉오리가 열리고 말았다는 것. 한 마디로 태풍이 벚나무 생체 시계에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는 얘기다. 소금기를 많이 머금은 바람이 나뭇잎의 개화 억제 호르몬 분비 기능을 약화시켰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 나타난 고온 현상이 벚나무의 개화 시기에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태풍 ‘콩레이’가 지나간 후인 지난 6일 일본 동해안 일부 지역의 낮 기온이 36℃를 넘는 등 이상 고온 현상이 발생했다. 반년 정도 일찍 꽃을 피운 벚나무는 막상 내년 봄 벚꽃 시즌에는 꽃을 못 피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년 봄 일본 전국의 벚꽃 축제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이번 10월 꽃을 피운 벚나무 수가 전체에 비하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벚나무가 살기 위해 가을에 꽃을 피웠다”는 해석도 나왔다. 왕왕 가을에 꽃을 피우는 벚나무가 있는데 그럴 경우 다른 나무에 비해 이파리가 적다고 한다. 태풍 등으로 이파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벚나무는 더 이상 이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생장을 억제하고 있는데 날이 풀리자 꽃망울을 피우게 했다는 것. 벚나무에 꽃이 피면 새로운 이파리가 생겨난다. 이파리가 있어야 광합성을 해서 추운 겨울을 버틸 양분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벚나무가 때아닌 가을에 꽃을 피운 건 스스로가 살기 위한 자구(自救)의 몸짓이란 얘기다.

이렇게 식물이 특정 계절에 꽃을 피우는 것은 기온과 광주기(밤낮의 길이 변화)를 인지하는 자체 메커니즘을 가진 덕분이다. [사진 성태원]

이렇게 식물이 특정 계절에 꽃을 피우는 것은 기온과 광주기(밤낮의 길이 변화)를 인지하는 자체 메커니즘을 가진 덕분이다. [사진 성태원]

식물이 특정 계절에 꽃을 피우는 것은 기온과 광주기(밤낮의 길이 변화)를 인지하는 자체 메커니즘을 가진 덕분이다. 식물도 24시간을 주기로 돌아가는 생체 시계를 갖고 있다. 이 생체 시계를 통해 기온과 광주기를 판단하면서 계절 변화를 알아차린다. 그런데 태풍이나 기온 등 날씨 요소가 식물 고유의 생체 시계에 착각을 일으키게 할 경우 이번 같은 때아닌 가을 벚꽃 소동도 일어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올가을 우리나라에서도 극히 일부지만 때아닌 벚꽃이 목격됐다. 한 달여 전인 9월 19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상창리 상창보건진료소 뒷골목 벚나무가 분홍빛 꽃망울을 터트렸다. 꽃이 나무 절반에 걸쳐 피었고, 주변의 다른 벚나무에서도 피었다고 한다. 역대 1위의 폭염이 끝나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기에 때아닌 벚꽃이 활짝 피었던 셈. 이달 16일 진해 명동에서도 두 그루의 벚나무에서 벚꽃이 핀 모습이 관찰됐다.

벚나무는 돌연변이가 흔하고 개량종이 많다고 한다. 그 결과 자생종과 개량종을 포함해 무려 600여 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해지는 가운데 일본의 이번 같은 가을 벚꽃 소동이 이후에 또 일어날지 주목된다.

성태원 더스쿠프 객원기자 iexlo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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