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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GM은 밉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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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답이 없다.”

생산 - R&D 법인 분리 막을 수 있나 #미래 기술 한 축 맡는 방법 찾아야

연구개발 법인 분할로 다시 시끄러워진 한국GM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올 초 한국GM 자금 지원 협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의 목소리에는 체념마저 묻어 있었다.

“GM은 결국엔 떠날 것이다. 법인 분할은 이를 위한 체중 줄이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GM은 떠나기 전까지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인력을 줄여 가며 정부에는 지원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고용을 볼모로 한 줄다리기는 선거 때마다 불거질 것이다.”

지나친 불신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10년 전 금융위기로 죽다 살아난 GM의 제1 목표는 과거처럼 몸집이 아니라 생존과 수익이다. 투자 회의에서 메리 바라 GM 최고경영자(CEO)의 질문은 언제나 같다. “우리가 수익을 낼 수 있는가. 여기가 이 자본을 투자할 최고의 장소인가.” 메리 바라가 아니더라도 GM이 주주의 76%를 차지하는 월가 기관투자가의 수익 추구 압박을 견뎌낼 재간은 없다.

현재 한국GM을 보면 그나마 연구개발 능력을 높이 평가받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산은 갈수록 줄고, 적자는 1년에 1조원 가까이 쌓인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그래도 GM이 한국을 안 떠나는 것은 정부 지원금 때문만은 아니다”고 말한다. 한국의 싸고 좋은 부품 공급 능력과 괜찮은 연구개발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이런 장점이 강성 노조와 낮은 완성차 생산성이라는 단점을 상쇄하고 있다.

한국GM의 연구개발 능력은 GM 본사 스스로 3대 차량 개발 거점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경쟁력이 있다. 인천 청라의 GM 주행시험장(프루빙 그라운드)은 인천시가 무상으로 제공한 50만㎡의 부지에 36개의 주행로와 각종 시험실을 갖춘 최첨단 연구소다. 세계 최초로 시험실 안에서 사계절의 온도와 습도, 태양 빛을 자동 조절하는 연구동까지 두고 있다. 500여 명의 연구원도 우수하다. 신속하게 과제를 해결해 내는 성실성은 GM 내 세계 어느 연구소보다 뛰어나다. 생산 부문은 높은 임금이 문제 되지만 연구 부문은 오히려 임금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마저 받는다.

노조는 생산과 연구개발이 분리되면 독자 생존력을 갖출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GM이 떠날 경우를 상정한 우려다. 하지만 이미 세계 자동차업계는 연구개발과 생산 현장을 분리하는 추세다. 가령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GM 전기차 볼트의 개발을 한국GM 디자인연구소에서 맡는 식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독자 생존’보다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할 때다.

GM의 법인 분할은 사실 막을 방법이 없다. 산업은행이 애매한 입장을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차라리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GM의 연구개발 능력을 더 극대화하고, 이를 한국 내 생산과 접목하도록 GM을 압박하는 것이 현실적일지 모른다. 세계 자동차 업체의 눈은 이미 자율주행차나 미래형 전기차에 가 있다. GM은 최근 공유 서비스 기능을 갖춘 로봇 택시 개발에 착수했다. 이런 미래 기술 개발의 일부라도 한국에서 담당하는 것이 GM을 붙들어 매는 안전띠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천시가 무상 제공한 청라 시험장 회수를 들먹인 것은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혹시나 이를 고리로 GM의 한국 내 연구개발 투자를 압박할 생각이라면 몰라도.

한국 정부와 지역 사회, 노조 같은 이해관계자는 안중에도 없는 GM의 경영은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세금을 퍼부어 일자리를 구걸하는 일을 그만두려면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이 당장의 국민 정서에 어긋나더라도. 정부나 정치인들이 그럴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