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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치매 치유 전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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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샌드라 데이 오코너(88)는 1981년 선임된 미국 첫 여성 연방대법관이다. 유리 천장을 깬 강인한 법조인,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중도의 여왕’으로 불렸다. 그런데 정작 더 유명한 애칭은 ‘치매 치유 전도사’다. 치매 남편을 돌보면서 그 체험을 바탕으로 치매 예방과 환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활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서다. 그런 오코너가 그제 “알츠하이머병 치매 초기 단계”라고 스스로 밝혔다는 소식이다. 안타까움과 응원의 메시지가 이어진다고 한다.

오코너와 치매 남편의 순애보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2006년 돌연 종신직인 대법관을 그만둔다. 순전히 치매 남편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요양시설에 들어간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치매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지켜봐야 했다. 남편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요양시설을 방문해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미국 사회에 감동을 준 슬프지만 숭고한 사랑이다.

얼마 전 치매 취재를 하면서 만난 치매 환자 가족들 사연도 대동소이하다. 힘들고 슬프지만 돌봄의 바탕엔 애틋한 가족애가 자리잡고 있다. 문모(79) 할머니는 5년째 치매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낸다. 시설에 모시자는 딸의 거듭된 청을 마다하고 집에서 돌본다. 남편에게 쉼 없이 말을 거는 게 일과다. “말귀를 알아듣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 같기도 해. 측은해. 가는 날까지 잘해 주고 싶어. 어쩌다 웃기라도 하면 힘든 게 다 날아가지.” 노모(56)씨는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치매 시어머니를 10년째 수발한다. “가엾고 안쓰럽고 그래서 더 다가가는 겁니다. 가족이니까요.”

이들의 공통점은 오코너처럼 주위에 치매 예방과 환자 대처법을 알리는 치매 치유 전도사를 자처한다는 거다. “치매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생각이 “치매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진 결과다. 또 다른 공통점은 치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 치매를 당당하게 고백한 오코너의 성명에 그런 자세가 엿보인다. “치매가 있는 삶의 마지막 단계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할지 모르지만 축복받은 내 삶에 대한 감사와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70만 명을 헤아리는 국내 치매 환자 수가 6년 뒤 100만 명에 이른다. 불청객 치매지만 동거를 피할 수 없는 친구처럼 여겨야 할 세상이다. 치매가 이제 단순히 노령병·장수병이 아니라 ‘국민병’인 셈이다. 그래도 변치 않을 건 치매의 최고 약은 ‘가족의 사랑’이란 거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