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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

그는 폐암 4기였다…김한길의 특별한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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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한길 전 대표, 왜 모습 안보였나 했더니 

김관영 바른 미래당 원내대표를 얼마 전 만났다가 두 번 놀랐다.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 대표의 근황을 듣고서다. 김 전 대표가 그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작년에 폐암 4기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완치됐다”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아내 최명길 덕, 날 아이처럼 챙겨 #환자 20%만 맞는 신약, 암세포제어 #작년 10월 발견, 이대로가면 완치” #“내 이촌동‘옥탑방’서 독감걸린 #문재인 대표, 담요 덮어쓰고 #나와 시국고민 … 잘 했으면” #“정치는 내게 끝없는 좌절줬지만 #의미있는 좌절이라 후회 없다”

김 전 대표는 부인인 배우 최명길씨와 함께 이달 초 방송 예능프로그램(tvN‘따 로또같이’)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방송에선 암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있다. 김 전 대표에게 지난 18일 문자메시지를 보내봤다. 다음날 그에게 전화가 왔다.

“김한길인데요. 제게 무슨 얘기가 듣고 싶으신가요.”

조심스럽게 암 투병기를 꺼냈다.

“투병기? 뭐,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약 먹었지. 수술 뒤 합병증이 있어서 많이 고생했어요. 지난 1년 동안 너무 아팠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몰라요.”

하지만 그는 “괜히 귀한 시간만 낭비할 텐데, 그래도 괜찮으면 밥이나 먹읍시다”라고 했다. 결국 지난 23일. 아직은 투병 중인 김 전 대표를 만났다. 그가 집무실로 쓰고 있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옥탑방’에서였다.

암에 걸리기 전 기자간담회를 하는 김한길 전 대표. 간담회 장소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 식당건물 2층의 옥탑방. 이곳으로 수많은 거물정객들이 비공개로 다녀갔다. 여기서 김한길 전 대표를 만났다. 뉴스1

암에 걸리기 전 기자간담회를 하는 김한길 전 대표. 간담회 장소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 식당건물 2층의 옥탑방. 이곳으로 수많은 거물정객들이 비공개로 다녀갔다. 여기서 김한길 전 대표를 만났다. 뉴스1

①암 선고, 투병, 최명길씨 내조와 극복=만약 모르고 그를 만났더라면, 암 투병 중임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뻔했다. 건강을 상당히 되찾은 까닭이다. 체중이 한때 20kg 가까이 빠졌으나 거의 회복했다고 한다.

-예전 모습 그대로다.

“오히려 더 좋아졌단다. (웃으며) 항암 치료 중엔 잘 먹어야 된다고 해서 맛있는 걸 많이 먹으니까.”

암을 이겨낸 김 전 대표의 최근 모습. 부인 최명길씨와 함께 출연하는 tvN 예능프로그램 '따로 또 같이'를 소개하고 있다. 암에 걸리기전과 거의 차이가 없다. 기자가 만났을때도 이 모습이었다. [일간스포츠]

암을 이겨낸 김 전 대표의 최근 모습. 부인 최명길씨와 함께 출연하는 tvN 예능프로그램 '따로 또 같이'를 소개하고 있다. 암에 걸리기전과 거의 차이가 없다. 기자가 만났을때도 이 모습이었다. [일간스포츠]

-언제 암을 발견했나.

“여의도를 떠나있던 작년 10월이다. 폐암은 통증이나 사전징후가 없어 우연히 알게 됐다. 바로 수술을 했고, 센 약들을 계속 맞았다. 암세포가 폐 밖으로 전이되면 폐암 4기라던데 올 4월 전이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폐암 4기면 대체로 10개월 더 산다든가.”

-아, 정말 잘 견뎌내셨다.

“신약이라는 걸 맞았다. 획기적인 신약이라는데 특징이 10명 중 한두 명에게만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 신약이 내 몸에 안 맞으면 할 수 없는 건데, 나한테 제대로 맞았다. 신약으로 (암세포가) 제어돼서  이대로 가면 완치도 가능하단다.”

10~20%의 확률. 듣는 입장에서도 아찔했다.

-정말 다행이다.

“(담담히) 재수가 좋았던 거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마음이 어떠셨나.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남들은 ‘왜 하필이면 나야’라는 생각이 처음에 든다는데, 진짜로 덤덤했다. ‘나한테도 그런 게 왔구나’ 정도? 몸이 심각하게 아플 때는 ‘버킷리스트’(bucket listㆍ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도 생각해봤다. 별로 올릴 게 없더라. 치열하게는 산 것 같다.”

그는 정치권에서 알아주는 골초였다.

-담배를 하루에 얼마나 태우셨나.

“한 네다섯 갑? 보루로 사다 놓고 피웠다. (암 선고받은 뒤 사다 놓은 담배들을) 다 동생 주려고 했는데 최명길이 막 뭐라 그러더라. ‘피우는 담배도 끊게 해야 하는데, 당신은 남은 걸 모아서 동생을 주냐’고. 아프게 지내는 동안 나는 아무 결정권도 없었다. 우리 집사람이 그냥 애들 챙기듯이 너무 잘 챙겼다.”

-정치권에선 암 투병 중인 걸 거의 모르던데.

“내가 전혀 얘기를 안 해서 가까운 사람도 몰랐다. 오래전에 잠깐 중앙여고에서 교사했는데, 이제는 50대 중반을 넘긴 제자들이 언젠가 찾아왔다가 나를 보자마자 ‘어디 아프세요?’라고 물어보지도 않고 막 울더라. 병색이 그렇게 완연했었나 봐. 그 이후 괜히 걱정만 나눠주는 것 같아 아무도 안 만났다. 관영(김관영)이나 이철희(더불어민주당 의원, 김 전 대표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일 때 행정관)도, 누구도 안 보다가 이렇게 멀쩡한 사람처럼 된 다음에야 만났다.”

그게 10월 들어서라고 한다. 그런데 암 얘기를 자꾸 묻는 것이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았다. 누군들 고통을 다시 기억하고 싶을까. “그만하고 정치 얘기할까요”라고 하자 선뜻 “그러자”고 했다.

②‘김한길 옥탑방’ 다녀간 거물들=김 전 대표의 옥탑방은 지은 지 10년이 넘어간다. 김 전 대표는“(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나니 갈 곳이 없더라. 마침 이 (단층) 건물이 최명길 거라고 하길래 내가 옥탑방을 지어버렸다”고 했다. 이곳을 수많은 거물급 정객이 다녀갔다. 그중 한명이 안철수 전 바른 미래당 서울시장 후보다.

김 전 대표는 지난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석 달 앞두고 3월 2일 ‘안철수 신당’과의 통합을 성사시켰다. 김 전 대표는 “그게 이 옥탑방에서 한 것”이라고 했다.

-물밑에서 협상하다 이 공간에서 합의했다는 뜻인가.

“아니. 딱 하루 만에. 그 전날(3월 1일) 밤 9~10시쯤 안철수가 이리로 와서 새벽 2시쯤 합의한 뒤 다음 날 아침(3월 2일) 기자회견을 해서 발표해버렸다.”

김한길-안철수, 두 사람이 2014년 3월2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통합을 전격 발표했다. 통합발표 하루전 두 사람은 이촌동 옥탑방에서 새벽에 협상을 타결했다고 김 전 대표가 밝혔다. [중앙포토]

김한길-안철수, 두 사람이 2014년 3월2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통합을 전격 발표했다. 통합발표 하루전 두 사람은 이촌동 옥탑방에서 새벽에 협상을 타결했다고 김 전 대표가 밝혔다. [중앙포토]

야권통합으로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 '거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방선거 중앙선대위를 구성했다.왼쪽부터 김두관·정세균 위원장, 김한길·안철수 당시 공동대표, 문재인 정동영 위원장. [사진·중앙포토]

야권통합으로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 '거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방선거 중앙선대위를 구성했다.왼쪽부터 김두관·정세균 위원장, 김한길·안철수 당시 공동대표, 문재인 정동영 위원장. [사진·중앙포토]

당시 하나의 여당(새누리당)과 두 개의 야당(민주당+안철수 신당) 구도가 순식간에 1대1 구도로 바뀌었다. 전광석화처럼 이뤄진 '옥탑방 정계개편'이었다.

-역사가 그렇게 5시간 만에도 이뤄지는군요.

“디테일 갖고 협상하면 잘 안 된다. 지분 같은 얘기는 일절 안 하고, 같이 가는 게 서로가 사는 길이니 더 망설일 거 없다고 했다. 여기서 뭐, 그런 거 많이 했다.”

-또 어떤 분이 다녀갔나.

“뭐, 우리 문재인 대통령도 왔었지.”

-문 대통령?

“(하품하면서) 안 온 사람 없지 뭐. 반기문.”

-문 대통령은 언제쯤 다녀갔나.

“대표 때(2015년 2월~2016년 1월)던가? 겨울이었다.”

당시 친문재인-비문은 통상적인 주류-비주류의 갈등을 넘어 내전 중이었다. 그 무렵 문 대통령이 비문 진영의 좌장으로 분류되던 김 전 대표의 옥탑방을 비밀리에 다녀간 것이다.

-민주당 분당을 막기 위해 방문했나.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런 거 같다. 나를 설득하려고 했으니. 사람들 눈을 피해 여기서 본 건데, 그때 여기에 며칠간 불을 안 때 냉방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대표가 굉장히 심한 감기에 걸려있더라고. 보기에 안돼서 내가 두꺼운 담요를 꺼내 드렸지. 독감 걸린 문 대통령이 그걸 뒤집어쓰고, 떨면서 나와 시국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담요를 뒤집어쓴 문 대표와 둘이 서로의 고민을 많이 얘기했지.”

아무리 내전 중이었지만 이면에서는 따뜻한 담요가 오갔다. 물론 담요가 냉기는 녹였는지 몰라도 계파 갈등까지는 완전히 녹이지 못했다. 친문재인-비문 갈등은 결국 분당으로 치달았다. 김 전 대표도 2016년 1월 탈당했다. 옥탑방 회동 얼마 뒤였을 것이다. 김 전 대표가 주도한 또 한 번의 정계개편이었다. 이로 인해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열했다.

떠나는 김한길. 그는 2016년1월7일 기자회견을 열어 탈당을 선언했다. 회견을 마치고 승용차에 올라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중앙포토]

떠나는 김한길. 그는 2016년1월7일 기자회견을 열어 탈당을 선언했다. 회견을 마치고 승용차에 올라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중앙포토]

③김한길과 정계개편=그는 ‘판을 보는’ 정치를 해왔다. 그러다 보니 앞에 언급한 두 차례 외에도 정계개편을 여러 차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정계개편은 물론 비정상의 정치다. 그러나 지역감정이나 국정원의 정치개입 같은 비합리적이고 불법적 요인에 의해 선거가 좌우되던 시절. 야권의 통합운동 또는 연대 움직임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불가피한 생존술이었던 측면도 있다.

-지금 야권은 정계개편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한 번도 어려운걸.

“하하. 김한길이가 해서 된 게 아니고, 그런 (변화의) 흐름들이  있던 거지. 어쨌든 그런 진통을 통해서 우리 정치가 이만큼 발전해온 것 아닌가.”

-올해도 초반에 국민의당이 갈라졌다. 김 전 대표는 지금 바른미래당 소속인가.

“글쎄.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 막 갈렸던데.”

-김관영 원내대표에 따르면 ‘경외(敬畏)심을 갖고 권력을 대하라’는 말을 후배 정치인들에게 자주 한다는데.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문화관광부 장관을 할 때부터 굉장히 정치권력이라는 걸 두려워하고, 쓰는 데 조심했다. 권력은 날카로운 면도칼과 같은 거다. 그런데 요새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정치권력이 무서운 것임을 모른다. 너무 막 쓰는 것 같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그렇잖나.”

-문재인 정부에 할 말은.

“내가 지난 1년은 꽝이야. 잘 몰라서 조심스럽다. 그냥 잘했으면 좋겠다.”

그는 문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부산에서 상경한 문재인 변호사(민정수석 내정자)를 인사시켜 줬다고 한다. 이때 문 변호사가 자신에게 한 첫 마디가 “서울에 방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과는 너무 신분의 격차가 생긴, 정치권의 때가 전혀 묻지 않았던 변방 변호사의 모습이어서 잊히지 않는 것 같았다.

④가요 ‘화개장터’에 얽힌 사연=‘화개장터’ 얘기가 나왔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 지르는/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하는 그 노랫말은 김 전 대표가 지은 것이다.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 이곳에서 열린 '영호남 못난이 노래춤대회' 모습. 광주어린이 풍물단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가요 '화개장터'는 김 전 대표가 노랫말을 지었다. [중앙포토]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 이곳에서 열린 '영호남 못난이 노래춤대회' 모습. 광주어린이 풍물단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가요 '화개장터'는 김 전 대표가 노랫말을 지었다. [중앙포토]

“지역갈등의 뿌리를 없애려면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하는 것보다 딴따라 노래로 하는 게 훨씬 호소력 있겠다 싶어 만든 노래요. 그런데 조영남씨한테 ‘한번 해보실래요’ 했더니 처음에는 ‘아이들 건전가요 같아서 안 하겠다’더라고. ‘사랑 노래도 안 되는데 어떻게 이거 같고 히트하겠냐’는 거지. ‘사랑 타령도 작사해줄 테니 해보라’고 해도 싫대. LP판을 내는데, 노래가 8개인가 들어가요. 그런데 조영남 노래가 얼마 없잖아. 8개를 다 채울 수 없으니까 건전가요라고 싫다더니 결국 화개장터를 넣더라고. 그게 나중에 조영남을 30년 동안 먹여 살렸다던데? 하하.”

그는 정치인 말고도 다양한 삶을 살았다. 베스트셀러『눈뜨면 없어라』『여자의 남자』의  작가, 교사, 방송인, 기자, 시사 평론가, 심지어 작사까지 했다. 이쯤 되면 정체성을 문화인으로 봐도 되지만 그래도 그는 역시 정치인이다.

그는 “정치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1시간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정치란, 나한테는 끊임없는 좌절이었지만, 의미 있는 좌절이었다”면서다. 그는 "내가 의미 있는 좌절을 함으로써 기여한 것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겪은 좌절들이 서럽지만은 않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에게 정치권으로 컴백할 거냐고는 물어볼 수 없었다. 아직은 ‘거의 완쾌’이지 ‘완쾌’가 아니라서다. 투병이 끝날 때까지는 여백(餘白)으로 두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