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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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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SUNDAY 차장

임장혁 SUNDAY 차장

① 조울증을 앓던 아들 A가 엄마를 프라이팬으로 100여 차례 때려 살해했다.

② 정신분열 상태의 엄마 B가 딸의 목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사체를 토막냈다.

지난해 서울고법에서 재판을 받은 피고인 두 명은 모두 정신장애인이었지만 운명이 엇갈렸다. A는 징역 22년, B는 무죄였다. A는 ‘심신미약’으로 책임이 경감되는 데 그쳤지만 B는 ‘심신상실’로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의 정도 및 내용, 범행의 동기 및 원인, 범행의 경위 및 수단, 범행 전후 피고인의 행동…등을 종합해 법원이 독자적으로 판단한다”는 판례 문구만으로는 법원이 어떤 기준에 따라 둘의 차이를 구분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감이 온다. B는 악귀가 붙었다며 갑자기 딸을 공격한 반면, A는 평소에도 엄마의 잔소리에 폭력적 반응을 보였다. 정신질환을 빼면 범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라야 ‘책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게 법원의 태도다.

‘심신미약 감경 폐지’ 국민청원에 참여한 100만 명의 인식과는 달리 우리 법원은 피고인의 심신장애(미약+상실) 항변을 받아들이는 데 극히 소극적이다. 2014~2016년 1심 재판에서 한 1597건의 심신장애 항변 중 법원은 305건만 받아들였다는 연구도 있다. ‘심신상실 무죄’ 사례는 2014년 1건, 2015년 3건, 2016년 0건이었다. 한 해 사법처리되는 정신장애인이 8211명(2016년 기준)이다. 판사들이 응보적 관점에 치우쳐 있을 수도 있고, 여론에 부담을 느껴서일 수도 있다.

‘PC방 살인’ 이후 국회의원들은 심신미약 감경제도를 완화 또는 폐지하자는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시민들의 공포와 불안에 답이 될까. 범인 김성수(29)에게 징역 30년형을 선고하더라도 치료되지 않는다면 정신장애가 한껏 심해져 사람을 죽일 힘이 남은 나이에 출소하게 된다. 범죄자의 정신이 중형을 받아도 반성도, 후회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재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엄벌이 아니라 무기한 격리 치료다.

그러나 우리의 사법의료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국내 유일의 정신장애 범죄인 치료시설인 공주법무병원은 포화를 넘어 폭발 직전이다. 정원은 728명이지만 입원 환자는 1200명에 육박하고 50명 이상 몰아넣은 방이 9개나 된다. 법원이 믿고 치료를 맡기기 어려운 여건이다. 인구가 우리나라 두 배도 안 되는 독일은 사법병원과 사법병동을 77개소나 운영한다. 법무부는 궁여지책으로 매년 완치 여부가 불분명한 살인범 수십 명에 대한 치료를 ‘가종료’한다. 정부와 국회에 급한 건 형법을 전근대로 돌리는 게 아니다. 사법의료 체계 정비에 파격적 예산을 투입할 길을 찾는 일이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