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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법 없이 시행령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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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우화다. 한 여행자가 식당 주인장에게 빵값을 물었다. “3달러만 내시구려.” “그럼 2개 주시오.” 주인장이 빵을 건네는 사이 흑맥주를 보곤 얼마냐고 했다. “한 병에 6달러요.” “지금은 배보다 목을 먼저 축여야 할 것 같군. 빵 2개를 흑맥주 한 병과 바꿔도 되겠소?” “좋소.” 여행자가 단숨에 맥주를 들이켜곤 가게 문을 나서려 했다. 주인장이 맥주값을 내라고 하자 여행자가 이렇게 답했다. “맥주값으로 빵 2개를 줬는데 무슨 돈을 또 내란 말이오.” “하지만 빵값은 내지 않았잖소.” “빵을 먹지도 않았는데 왜 돈을 내야 한단 말이오.”

『하버드의 논리수업』에 나오는 얘기다. 궤변이다. 말은 말이로되 맞는 말은 아니었다. 음식물 섭취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본질은 그대로였다.

최근 판문점 공동선언과 평양 선언의 국회 동의 절차를 두고 청와대·법제처 등이 하는 주장을 보며 떠오른 얘기다.

현 정부는 두 가지를 내세운다. 남북관계발전법 조항(중대한 재정적 부담 또는 입법사항일 때 국회 동의)과 1997년 헌법재판소와 99년 대법원의 “남북기본합의서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조약이나 이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결정이다. 그러면서 막대한 재정 소요가 있을 판문점 선언에 대해선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판문점 선언의 후속 합의 격인 평양 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에 대해선 동의 절차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청와대에선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남북 합의는) 조약이 아니다”고 했다.

나름 말이다. 하지만 맥락을 보면 다르다. 20세기의 헌재·대법원이 판단한 건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다. “자주 왕래하고 잘 지내 보자”는 ‘신사협정’이다. 우리의 하늘에 우리 비행기를, 우리 바다에 우리 배를 못 띄운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영토주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데도 지난 세기의 기준을 거론한다? 오도다.

코미디도 있다. 법체계에 빗대면 “평양 선언은 후속 조치니 시행령”(허영 경희대 석좌교수)이다. 곧 발효된다. 하지만 모법인 판문점 선언은 국회 계류 중으로 발효도 안 됐다. 그래도 되나.

진정 안타까운 건 이거다. 남북관계의 진정한 동력은 지지에서 나온다. 야당 성향의 일부라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남북 합의가 9년간 이어지지 못한 건 ‘대못’을 박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진영 밖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지 않아서다. 야당도 설득하는 노력, 그게 우리 체제와 북한 체제의 근본적 차이다. 왜 그걸 포기하는가. 진정 우화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