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볼 땐 어떤 캐릭터인지도 몰랐어요. 제 역할이 ‘내기니’란 건 영국에서 본 최종 면접에서 감독님을 만나 에즈라 밀러와 호흡 맞추면서 알게 됐죠. ‘어벤져스’보다도 비밀이 많았던 것 같아요.”
다음달 14일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감독 데이빗 예이츠)로 23일 서울 용산에서 만난 배우 수현(33)은 1년 가까이 비밀에 부쳐졌던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3년 전 히어로 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한국계 과학자 닥터 조 역으로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와 세계관 공유 #할리우드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2’ #한국배우 수현, 뱀 여인 역할 출연 #원작과 다른 설정·인종차별 논란도 #"각본 쓴 원작자 JK 롤링 믿는다"
이번 영화는 마법 세계를 그린 인기 판타지물 ‘해리 포터’ 시리즈를 계승해, 그보다 앞선 시대를 다룬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2편. 영국 마법사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 분)가 스승 덤블도어(주드 로 분)와 힘을 합쳐, 인간을 지배하려는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조니 뎁 분)에 맞서는 얘기다.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이 세계를 창시한 영국 작가 JK 롤링이 직접 각본을 맡아, 백과사전 형태였던 동명 원작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빚어냈다.
하지만 영화는 개봉 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수현이 맡은 내기니 역 때문이다. 내기니는 원작에서 악당 마법사 볼드모트가 소유한 뱀으로, 인간이었다는 복선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수현의 캐스팅에 원작 팬들이 불만을 표한 이유다. 백인 남성 마법사에게 순종하는 뱀 캐릭터에 아시아 여성 배우를 기용했단 점도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측면에서 우려를 낳았다.
이번 영화의 각본을 맡은 원작 소설가 JK 롤링은 이에 자신의 SNS에 "내기니란 이름이 유래한 '나가(Naga)'는 인도네시아 신화에서 뱀을 닮은 생물"이라 발언해 논란을 키웠다. '나가'는 인도네시아가 아닌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반신(半神)격의 뱀. 일각에선 그가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구분 못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한국 배우가 캐스팅된 데 대한 변론을 하며 그가 "인도네시아는 자바족, 중국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고 부연 설명한 부분은 자칫 아시아인이면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똑같다는 식의 아시아 비하적 사고방식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 받았다.
두 달 전 예고편 출시와 함께 자신의 배역을 공개하며 “내게는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라 들뜬 모습을 보였던 수현은 “이런 논란은 전혀 예상 못했다. 저도 외국에서 일하는 아시아 배우로 나름대론 책임감을 느끼며 역할을 선택해왔는데…”라며 담아온 속내를 털어놨다. 후드 티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편안한 차림. 인터뷰 내내 그의 태도도 거리낌 없고 소탈했다.
- 오디션은 어떻게 봤나.
-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란 것만 알고 오디션을 봤다. 원래 해리 포터 팬이다. 원작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중학생이었는데 한국 번역본을 기다리기가 힘들어 미국에서 책을 구해왔을 만큼 좋아했다(수현은 아버지의 해외 발령으로 5살부터 6년간 미국에서 거주하다 한국에 돌아와 영어가 유창하다).”
- 합격할 거란 느낌은.
-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감독님을 뵀을 때. 에즈라가 상대역을 해줬는데 호흡이 좋았다. 감독님과 롤링 작가님도 제가 내용을 모르고 했던 직관적인 연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더라. 그날 제 역할이 내기니란 걸 듣곤 깜짝 놀랐다. 역시 JK 롤링은 반전의 여왕이구나, 재밌다, 감탄했다. 작가님이 매 작품 놓치는 캐릭터 없이 각자의 스토리를 깊이 있게 그리잖나. (내기니의 의외의 출연에) 원작 팬들이 열광할 거라 생각했다.”
- 이번 영화 제작 단계에서 원체 베일에 가려있던 캐릭터다.
- “오디션 때도 한 장면 정도 쪽 대본을 줬다. 사연 많은 사람이고, 여성미 많고, 상처받은, 여린 영혼 같은 느낌이어서 뭔가 마음에 들었다.”
- 그런 면이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란 비판이 있다. 원작자이자 이번 영화 각본에 참여한 JK 롤링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 때도 유일한 아시아계 캐릭터 초챙을 의존적인 여성으로 설정해 비판 받았다.
- “이번 일을 계기로 아시아 배우로서 정말 더 예민하게 캐릭터를 고민해야겠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저로선 롤링 작가님을 믿고 있다. 작가님이 쓴 소설들에서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느꼈다. 영국에서 연극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가 공연됐을 때 (영화에선 백인 배우가 연기한) 헤르미온느 역할을 흑인 배우가 맡은 데 대해서도 옹호발언을 하시지 않았나. 또 내기니가 볼드모트의 애완 뱀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저는 『해리 포터』소설을 읽으며 내기니가 연약하거나 수동적이라기보단 볼드모트의 영혼을 나눠가진, 강력한 존재라 느꼈다.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앞으로 다뤄질 이야기가 많으리라 본다.”
- 영화 스틸로 미뤄봐선, 1편에서 뉴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종적을 감춘 청년 크레덴스(에즈라 밀러 분)와 가까운 사이로 보이더라.
- “2편에서 크레덴스는 자신을 추적하는 마법사들을 피해 프랑스 파리의 서커스단에 숨어든다. 저는 그 서커스단에 붙잡혀있다 그를 알게 된다. 내기니는 ‘말레딕투스’인데 저주로 인해 언젠가 완전히 동물로 변하는 존재를 뜻한다. 이번 영화에도 제가 뱀으로 변하는 장면이 있다.”
- 뱀의 몸짓은 어떻게 준비했나.
- “이 영화 1편과 영화 ‘대니쉬 걸’ 등에 참여한 무브먼트 코치와 함께 뱀으로 변신하는 순간의 감정적인 몸짓들을 고안했다. 감독님 디렉션이 ‘2% 뱀을 더 가미해봐’ 이런 식이었는데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재밌었다. 뭔가 내 본능에 의존해서 몸을 쓴 적이 처음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저 자신을 믿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했다.”
- 파리가 무대였다면, 불어도 했나.
- “분량이 많진 않지만 언어 욕심이 있어서 신경썼다. 실제 촬영은 영국 스튜디오에서 했다. 1920년대를 구현한 세트장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정교했다. 바로 옆에 해리 포터 박물관이 있어서 이 시리즈의 역사가 서린 상징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저도 박물관에 가서 내기니 뱀 앞에서 얌전히 ‘셀카’를 찍었다(웃음).”
- 상대역 에즈라 밀러는 배우이자, 환경운동가고, 밴드 활동도 하는 독특한 배우다.
- “저도 좋은 의미로 그런 사람 처음 봤다. 어떨 땐 정말 순박한 아이 같으면서도 진짜 끼가 많다. 감독님이 너희 둘 친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서로 노력도 했다. 영국 있을 때도 편하게 같이 외출도 하고, 지난 8월에 에즈라의 밴드가 서울에서 공연했을 때도 보러 갔다.”
- 시리즈가 5부작으로 알려졌다. 후속편도 출연한다고.
- “뒷얘긴 아직 비밀이다. 배우들도 아직 자기 배역의 전체 스토리를 모르고, 부분적으로 듣는 정보에 의존해서 연기하고 있다.”
- 할리우드에 진출한 지 올해로 5년 차다. 미국에서 출연한 또 다른 영화 ‘이퀄스’ ‘다크타워:희망의 탑’ 등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 “규모와 상관없이 다양한 작품을 해보고 싶어 출연했고 앞으로도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려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오히려 저를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폴로’로 많이 알아보신다. 최근 아시아계 배우들이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주목받았지만 ‘마르코폴로’는 그보다 더 다국적인 캐스팅이었다. 저뿐 아니라 중국, 몽골 배우도 출연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 선배님이나 존 조도 그렇고, 저한테도 보다 다양한, 일상적인 역할을 할 기회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
- 최근 할리우드에서 아시아 배우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는데.
- “체감한다. 지금도 ‘마르코폴로’ 배우들과 자주 연락하는데 오디션을 본 작품에서 아시아인 배역에 백인이 섭외됐다거나, 영화 한 편에 아시아인이 고작 한 명 나온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부턴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할리우드를 바꾸려면 아시아 배우들이 더 많이 뭉쳐야 한다.”
수현은 이화여대 국제학과 출신이다. 국제변호사, 앵커 등을 지망하다 2006년 한중 모델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TV 드라마 ‘게임의 여왕’에 출연하며 연기에 발을 들였다. 이후 드라마 '도망자 Plan.B' '7급 공무원' 등에 출연했지만, 갑작스레 삶이 바뀌면서 오랜 공백을 가질 만큼 혼란스러웠던 시기도 있었다고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포기하지 않길, 부딪혀보길 잘했다. 인생이 재밌다”고 그는 말했다. 한 번 작품에 들어가면 7~8개월 해외에 체류할 때도 있지만 “저는 한국 사는 한국사람이다”이라 강조했다. “떡볶이 먹고, 친구들 만나고, 강아지랑 산책하는 일상이 제일 그립다”고 했다.
- 해외 활동하며 가장 힘든 점은.
- “처음에 할리우드에 갔을 땐 적응이 안 돼 많이 울었고, 매니저한테 진짜 나 표 사서 한국 간다고 했던 적도 많다. 오히려 지금은 더 자유롭고 더 독립적인, 나다운 내가 된 것 같아 재밌다. 돌이켜보면 저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선지) 자라면서도 정체성 갈등이 심했다. 외국인은 아닌데, 완전히 한국 사람 같지도 않고. 그런 고민이 좋게 쓰여질 수 있는 시대를 만나, 이런 영화들에 출연할 수 있게 됐다. 개인적으로도 성장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해외에서 활동할 때도 아시아인이란 인식이 없을 만큼 잘 융화되는, 다른 아시아 배우들이 해보지 못한 역할도 도전하고 싶다.”
- 해외 진출하려는 젊은 배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 “거절이나 기다림에 개의치 않고 계속 시도해야 한다. 당연히 연기는 괴롭고 자신이 의심스러운 순간도 많지만 계속 스스로 자극하고 편한 것에서 벗어나려고 해야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으니까. 이번 영화에 함께한 조니 뎁은 워낙 어릴 적부터 좋아하고 존경한 배우인데 눈앞에서 촬영하는 한 테이크, 한 테이크가 아름답더라. 그런 걸 보고 배우면서 일한다는 게 감사하다.”
- 국내 작품 계획도 있나.
- “아직은 없지만,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성)’ 말고 색다른 역할이면 뭐든 좋다. 사실 할리우드 진출도 한국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역할을 기다리던 중에, 할리우드 작품 오디션을 보게 되면서 성사된 거였다.”
- ‘어벤져스’에서 맡았던 닥터 조 역할로 다시 마블 히어로물에 복귀할 가능성도 있을까?
-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마블 영화는 지금도 열심히 챙겨보고 있다. 조스 웨던 감독이 DC로 가서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마블 유니버스는 계속 커지고 있으니까(웃음).”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