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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오명, 신입생 안받겠다" 사립 유치원 적반하장 협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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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딸을 둔 정모(36·서울 진관동)씨는 최근 비리유치원 사태 후 밤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 비리유치원으로 밝혀져서다. 하지만 집 근처에 유치원이 많지 않아 해당 유치원이 아니면 딱히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정씨는 “그대로 보내자니 불안하고, 다른 데로 옮기자니 엄두가 안 난다”며 “아이 한 명 키우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1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사립유치원 비리 규탄 집회에서 유치원 학부모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사립유치원 비리 규탄 집회에서 유치원 학부모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정씨뿐 아니라 비리유치원 명단이 공개된 후 미취학 자녀를 둔 대부분 학부모가 혼란에 휩싸였다. 사립유치원이 대거 비리유치원으로 밝혀지면서 유치원에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없어서다. 하지만 국공립유치원 추첨은 ‘하늘의 별 따기’인 만큼 비리유치원이라고 알려져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자녀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비리가 없는 유치원을 찾더라도 먼 거리에 있을 경우 아이를 등원, 하원 시키는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 유치원 비리 알려져도 바꾸기 어려워 #'울며 겨자먹기' 심정으로 보내는 게 현실 #일부 유치원 내년도 신입 원아 모집 안해 #사상 최악의 유치원 입학전쟁 벌어질 듯

5세 아들을 둔 김혜리(36·서울 길동)씨는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도 급식비 운영 부적정, 시설적립금 임의 적립 등 비리가 있다고 밝혀졌지만, 맞벌이라 다른 유치원을 알아볼 여유가 없다. 아이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게 아니라면 내년에도 그냥 같은 유치원에 보낼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사립유치원에서 내년도 원아모집을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보육 대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현재 인천 일부 유치원에서는 내년도 신입생 모집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서울‧경기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유치원 원서접수(11월 21일)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역대 최악의 유치원 입학 전쟁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경기도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는 한 원장은 “평생을 유아교육을 위해 힘써왔는데 남은 건 ‘적폐’라는 오명뿐이다. 이런 식으로 유치원을 운영해야 하나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유치원을 운영 중인 또 다른 원장은 “정부와 갈등이 정리될 때까지 신입생을 받지 않는 게 맞는 것 같다. 폐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곳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20일 오전 서울 시청 인근에서 열린 유아교육ㆍ보육 정상화를 위한 모두의 집회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비리유치원 문제 관련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손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오전 서울 시청 인근에서 열린 유아교육ㆍ보육 정상화를 위한 모두의 집회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비리유치원 문제 관련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손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학부모들은 유치원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부 유치원이 신입 원아 모집을 포기하면 다른 유치원으로 아이들이 몰리게 되고, 추첨에 성공할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3세 딸을 둔 김모(34·서울 봉천동)씨는 “자신들이 잘못한 게 명백한 상황에서 사죄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왜 강경한 태도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이를 볼모로 학부모를 협박하는 것밖에 더 되냐”고 비판했다.

사립유치원들이 유치원 온라인 지원시스템인 ‘처음학교로’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혼란을 더욱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교육청이 처음학교로를 이용하지 않는 사립유치원에 대해 재정지원을 끊겠다고 밝히는 등 강경책을 폈지만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은 불참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국공립유치원에 전면 도입된 처음학교로는 온라인으로 원서접수·추첨·등록까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들이 유치원 추첨을 위해 휴가를 내거나 다른 가족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다. 올해 사립유치원 전면 도입이 무산되면서 내년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부모들은 결국 발품을 팔아 유치원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다. 3세·7세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첫째 유치원 입학 때도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를 모두 동원해야 했는데 둘째 때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하니 정말 끔찍하다. 정부와 유치원 간의 갈등에 학부모만 피해를 보는 것 같다. 이제 서로 양보해서 해결책을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주말에는 곳곳에서는 ‘비리 유치원 규탄’을 외치는 학부모들의 집회가 잇따라 열렸다. 20일에는 서울 시청역 일대에서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이 집회를 열고 책임자 처벌 및 유치원 국가회계시스템 도입을 촉구했고, ‘명품가방 파문’ 환희유치원이 위치한 경기도 화성시 동탄에서도 21일 학부모 500여명이 모였다. 장하나 정치하는 엄마들 공동대표는 “교육당국이 다음 주에 대책을 낸다는데, 학부모나 교사 목소리는 듣지 않아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다음 주에는 교육부를 상대로 비리 유치원 공개가 왜 늦어졌는지 따질 것이고, 감사원·국민권익위 진정으로 공무원 책임자 처벌에 나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전민희·김정연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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