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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 잃어 튀지 않는 공으론 일자리 게임 못 이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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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논설위원

최근 들어 고용 시장을 논할 때 고약한 유추법이 등장하곤 한다. 대기업의 이익은 부쩍 늘었는데 고용은 그에 못 미친다는 통계를 놓고서다. 하기야 지난해 50대 대기업의 영업이익은 55% 늘었다. 고용은 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정치권을 비롯한 일각에선 대기업을 싸잡아 공격한다. 사람을 안 쓰고 돈만 번다는 식이다.

일본과 16.5배 차이 나는 고용탄성치로 뭘 할 수 있나 #고경직 파손 정책 버리고 고탄성 반발 정책 장착해야

얼마 전 이정묵 SK이노베이션 노조위원장이 이런 유추 해석에 답을 내놨다. 회사의 특성을 얘기하면서다. 그는 “우리 회사는 사람 수가 많다고 매출이 늘어나는 업종이 아니다. 숙련공이 필요하지 신입사원을 많이 뽑아 직원을 늘린다고 성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숙련도가 떨어지는 직원이 많으면 안전사고 위험이 커진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를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는 산업은 반도체와 석유화학이다. 이런 업종은 국민총생산(GDP) 기여도는 높지만 고용창출 효과는 작다. 국가와 국민 전체를 살찌우지만 개개인의 일자리까지 늘리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이 위원장의 말대로 고도의 전문성과 숙련도를 가진, 그리 많지 않은 직원에 의한 기술 개발과 부가가치 향상이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투입한 인력량 만큼 생산량이 나오는 전통적인 업종과는 다르다. 건설업이나 자동차, 숙박·음식업 같은 업종이 그런 류에 속한다.

이런 현상을 해석하는 용어가 고용탄력성이다. 취업자 증가율을 실질 GDP로 나눈 값이다. 고용탄력성이 1이면 경제가 1% 성장할 경우 고용도 1% 는다는 뜻이다. 한데 올해 2분기 고용탄력성이 0.132였다. 2010년 1분기 0.074를 기록한 후 33분기(8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일본의 고용탄력성은 2.178이다.

탄성이 중요한 골프공에 비유하면 한국산은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13㎝ 튀어 오르는데, 일본 공은 2.2m 튄다는 얘기다. 16.5배나 차이가 나는 이런 공으로 게임을 하면 결과는 불문가지다.

노동시장 정책은 탄성치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데 한국 노동시장 정책은 경직성 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공을 만들기보다 겉모양만 번드르르한 공에 집착한다는 얘기다. 이런 공은 티샷 한 번이면 곧바로 깨진다.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도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노사 간 협력은 평가 대상 140개국 중 124위였고, 임금 결정의 유연성은 63위, 해고비용은 114위로 최하위권에 랭크됐다.

기껏 신기술이라며 들고나온 소득주도성장론은 게임 시작과 동시에 깨졌다. 겉보기에 괜찮아서 ‘고탄성 반발 소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고경직 파손 소재’였던 셈이다. 그나마 혼돈의 노사관계 늪에 빠져 물을 잔뜩 머금은 상태여서 글로벌 무대에서 힘도 못 쓴다. 잘 나가던 기업마저 떠나는 판이다.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비리 의혹도 따지고 보면 한 번 정규직이 되면 성과든, 능력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년을 채우는 경직된 고용문화 탓이다. 노조가 발끈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정부나 정치권이 개입하는 건 덤이다. 이러니 자율권을 잃은 기업이 신입사원 뽑는 걸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고용시장의 대원칙은 채용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직을 무서워하지 않아야 한다. 유연한 임금과 근무체계, 다양한 일자리 형태 인정과 같은 고탄성 정책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대신 사회안전망을 확충해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막장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스갯소리로 고집이 세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게으른 정부에는 제대로 된 정책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재갑 신임 고용노동부 장관은 “일자리 창출은 민간의 몫”이라고 했다. 세 가지 유형을 한꺼번에 깰 수 있는 명제다. 다른 나라는 다 쓰는 탄성 좋은 정책을 부러워만 해서야 되겠는가.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