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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文 만나기 나흘 전, 교황은 피묻은 벨트를 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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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저항의 아이콘’ 시성하고 진보시대 예고 #군부독재 희생 로메로 혈흔 벨트 차고 미사 집전 #1980년 미사 도중 저격 당한 엘살바도르 대주교 #불의·불평등에 저항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울' #농민과 빈민의 벗, 정의와 사랑의 사제로 불려 #교황 '진보적인 바티칸 시대 열겠다'는 포고 성격 #개혁교황 바오로 6세도 성인으로…'낙태반대' 상징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로 대주교. 1980년 미사 집전 도중에 군부독재에 목숨을 잃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았던 그의 극적인 삶과 불의에 저항하다 맞았던 비극적인 죽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줬다. 로메로 대주교는 14일 바티칸에서 시성됐다. [위키피디아]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로 대주교. 1980년 미사 집전 도중에 군부독재에 목숨을 잃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았던 그의 극적인 삶과 불의에 저항하다 맞았던 비극적인 죽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줬다. 로메로 대주교는 14일 바티칸에서 시성됐다. [위키피디아]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죤 두이간 감독 연출, 라울 쥴리아 주연의 영화 '로메로'에서 군사정권에 징발된 교회로 들어가려는 로메로 대주교와 신자들이 총을 든 군인들에 가로막히는 장면.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으로 1980년 군부독재에 암살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지난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톨릭 성인이 됐다. 가난한 사람의 벗으로 압제에 맞서온 로메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울'로 불린다. [중앙포토]

죤 두이간 감독 연출, 라울 쥴리아 주연의 영화 '로메로'에서 군사정권에 징발된 교회로 들어가려는 로메로 대주교와 신자들이 총을 든 군인들에 가로막히는 장면.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으로 1980년 군부독재에 암살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지난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톨릭 성인이 됐다. 가난한 사람의 벗으로 압제에 맞서온 로메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울'로 불린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바티칸에서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이번 주는 즉위 뒤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을 만나 북한 김정일 국무위원장의 초청 의사를 대신 전달 받은 것도 물론 중요하다. 바티칸과 교황이 격랑의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의 불어넣는 조정자가 될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방북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18일 바티칸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프란치스코 교황. 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을 그를 대신해 교황에게 전달했다. [AP=연합뉴스]

18일 바티칸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프란치스코 교황. 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을 그를 대신해 교황에게 전달했다. [AP=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울’ 가톨릭 성인으로

두 정상이 만나기 나흘 전인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스카 로메로(1917~1980년) 전 엘살바도르 대주교와 바오로 6세(1897~1978년, 재위 1963~78년) 전 교황을 비롯한 7인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이번에 성인이 된 두 인물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로메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울’로 불릴 정도로 결정적인 인물이다. 교황의 말과 행동을 보면 로메로 대주교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식 다음날인 지난 15일 엘살바도르인 특별 접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이 살바도르 산체스 엘살바도르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산체스 대통령은 좌익 게릴라로 싸우다 1992년 이 나라에서 내란이 끝나자 제도권으로 들어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AP=연합뉴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식 다음날인 지난 15일 엘살바도르인 특별 접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이 살바도르 산체스 엘살바도르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산체스 대통령은 좌익 게릴라로 싸우다 1992년 이 나라에서 내란이 끝나자 제도권으로 들어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AP=연합뉴스]

중남미 ‘저항과 희생 아이콘’-순교자 인정

로메로 대주교는 군부독재 시절 사회정의를 부르짖다 1980년 미사 도중 독재정권의 하수인에게 살해당한 '순교자'다. 원래 정치에 관심 없는 학구파로 보수적인 전통주의자 사제로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1977년 대주교를 맡은 뒤 군부독재가 동료 사제를 살해하고 농민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자 군부독재에 온몸으로 항거했다.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성식 행사장에 이날 새로 성인이 된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왼쪽)와 바오로 6세 교황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성식 행사장에 이날 새로 성인이 된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왼쪽)와 바오로 6세 교황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EPA=연합뉴스]

가난한 민중의 챔피언 

미국 인터넷 매체인 복스에 따르면 로메로 대주교는 사회정의를 주장하고 가난과 싸워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엘살바도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 독재를 비난했다가 1980년 우익 민병대 암살조에 의해 병원 부속 경당에서 미사 도중 살해당했다. 그의 극적인 삶과 비극적인 죽음은 엘살바도르와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1979~82년 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던 ‘엘살바도르 혁명정부 평의회’라는 이름의 군부 독재 정권은 국민에 대해 수시로 대량 학살과 고문을 가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거리에서 지난 14일 새벽 한 시민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초상화를 들고 시성식을 생중계로 보면서 눈믈을 글썽이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는 이 나라 민중의 벗이었다. 바티칸의 낮시간은 엘살바도르 시간으로 새벽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거리에서 지난 14일 새벽 한 시민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초상화를 들고 시성식을 생중계로 보면서 눈믈을 글썽이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는 이 나라 민중의 벗이었다. 바티칸의 낮시간은 엘살바도르 시간으로 새벽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영화 '살바도르'와 '로메로'로 알려져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당시 엘살바도르의 현실은 1986년 진보적인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이 제임스 우드를 주연으로 내세워 연출한 ‘살바도르’와 1989년(한국에선 1993년 개봉) 존 두이건 감독이 만든 영화 ‘로메로’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특히 군인들에게 간청합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각각은 우리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죽이는 농부와 시골 사람은 여러분의 형제이자 자매입니다. 여러분이 죽이라는 명령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생각하십시오. ‘살인하지 말라.’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명령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이름과 비탄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억눌린 백성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나는 호소합니다. 나는 명령합니다. 억압을 중지하시오.”

영화 ‘로메로’에 나오는 로메로 대주교의 마지막 설교 장면에서 나온 대사다. 실제로 로메로 대주교는 암살되기 하루 전 신자들 앞에서 독재정권의 폭력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서 “하느님의 의지에 반하는 명령을 받은 병사는 이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라는 말을 했다. 그날 그의 말을 들던 신자 중에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징집된 군인도 상당수 있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발바도르의 시민들이 오스카 로메로 주교가 과거 봉직했던 교회 앞에서 그가 바티칸에서 시성되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는 빈민의 챔피언이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발바도르의 시민들이 오스카 로메로 주교가 과거 봉직했던 교회 앞에서 그가 바티칸에서 시성되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는 빈민의 챔피언이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자본주의 철폐의 수호성인' 가능성 

로메로 대주교는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가톨릭 교위 성직자로서 이처럼 불의에 맞서고 사회정의 구현에 헌신해왔다. 군부독재에 억압당하면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한 농민을 대변해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불리기도 한다. 사회정의를 추구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울’로 불린다. 로메로 대주교 시절의 불의가 ‘군부독재’라면 프란치스코 교황 시대인 21세기 초의 불의는 ‘불평등’이다. 고장난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와 바오로 6세를 시성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만천하에 재확인한 셈이다. 앞으로 임기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강력하게 표현한 셈이다.
이제 가톨릭의 성인이 된 로메로는 단순히 엘살바도르나 라틴아메리카의 강력하고 상징적인 존재로 머물지 않고 전 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의 성인으로 공경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로메로는 단순히 상징적으로 중요한 성인에 머물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로메로 대주교는 그를 공경하는 가톨릭 신자는 물론 비신도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자본주의 철폐의 수호성인’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5일 엘살바도르인 특별 접견을 하면서 한 신도가 가져온 로메로 대주교의 초상화를 살펴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5일 엘살바도르인 특별 접견을 하면서 한 신도가 가져온 로메로 대주교의 초상화를 살펴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교황, 피 묻은 벨트 매고 시성식

미국의 인터넷 뉴스사이트인 복스에 따르면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성식은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교황은 로메로와 자신의 연결고리도  강조했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의 뉴스 사이트에 따르면 시성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피 묻은 로프 벨트를 착용하고 나왔는데 바로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하던 그 순간에 두르고 있던 것이다. 교황이 얼마나 로메로 대주교를 존경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자신이 로메로와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국가인 아르헨티나의 사제로서 오랫동안 사회적 불의에 맞서오다 교황이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7명에 대한 시성식을 마치고 행사장을 떠나고 있다. 뒤에 이날 성인이 된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의 초상화와 대형 사진이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7명에 대한 시성식을 마치고 행사장을 떠나고 있다. 뒤에 이날 성인이 된 오스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의 초상화와 대형 사진이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피 묻은 벨트는 시각적인 하이라이트였다. 언어로 된 하이라이트는 이날 교황의 설교였다.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의 피 묻은 벨트를 차고 한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급진적인’ 본성을 강조했다.
“예수님은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셨고, 모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분열되지 않은 가슴을 요구했습니다. ”
이날 설교에서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의 이름을 굳이 거론하진 않았다. 대신 그 날 시성된 7명 모두를 집단적으로 칭송했다. 대신 교황은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사회적 지위, 권력에 대한 열망, 사회구조를 비판했다. 이들이 교회가 사명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짓누르고 세계와 교회 간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사실 로메로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논쟁 대상이었다. 비판론자들은 그를 ‘위험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로메로 대주교 시성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자신도 비슷한 공격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시점도 묘하다. 최근 사제들의 성적 학대 사건으로 교황 자리까지 도전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정치적인 도전을 바티칸 내부에서 받은 직후이기 때문이다.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를 축복한 것은 자신의 반자본주의 가치관을 분명하게 재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황 자신도 즉위하기 전부터 교회에서 로메로 대주교처럼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대주교 취임 초기까진 보수적-개혁 신부 암살에 분노해 저항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이는 로메로 대주교도 마찬가지다. 로메로 대주교가 살아있던 시절 라틴아메리카에선 ‘해방신학’이 세력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사명이 ‘영혼의 구원’에만 있지 않고 억압과 착취의 권력구조를 무너뜨리고 지상에서 ‘하느님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복스에 따르면 로메로 대주교는 억압과 착취에 반대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데까지는 같은 생각이었지만, 지상에서 하느님의 천국을 이룬다는 주장에는 동의한 적이 없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찬가지다. 로메로 대주교가 ‘해방신학에 빠졌다’는 주장은 그가 살해된 뒤 해방신학 측에서 그의 명성에 기대려고 했거나. 반대편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내몰기 위해 한 주장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비판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교회가 처한 사회적 현실에 주목해 억압에 저항한 것이지 가톨릭의 근본 교리와 다른 주장을 한 적은 한 차례도 없다. 이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외쳤을 뿐이다.

과테말라와 온두라스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 [CIA 팩트북]

과테말라와 온두라스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 [CIA 팩트북]

게릴라 출신이 엘살바도르 대통령 

로메로 대주교는 1917년 중미 엘살바도르의 내륙 소도시인 시우다드 바리오스에서 태어났다. 엘살바도로는 한반도 10분의 1 크기인 2만1041㎢의 면적에 2016년 추산으로 634만 명이 사는 작은 나라다. 국민의 47%가 가톨릭, 33%가 개신교도이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17%에 이른다.
엘살바도르는 중남미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20세기 들어 수시로 쿠데타가 발생해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했다. 1979~92년 우파 군사정권과 좌파 민족해방전선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1992년 유엔 중재로 휴전이 이뤄졌으며 게릴라전을 수행하던 민족해방전선도 제도권에 들어왔다.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였던 살바도르 산체스가 2014년 총선에서 승리해 현재 대통령을 맡고 있다. 유엔이 만든 진실위원회에선 당시 극우조직에서 로메로 암살을 기획했다고 결론지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엘살바도르에서 정치적인 역전이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가난하다. 로메로 신부가 그렇게 싸웠던 불의는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할 수 있지만, 가난은 아직 구제하지 못했다. 국제통화기금(IMF) 2017년 통계에 따르면 명목금액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400달러로 조사 대상 188개 나라 가운데 105위다. 2012년 기준 58억 달러에 이르는 수출품은 T-셔츠, 커피, 설탕이 주를 이룬다. 미국이 수출품의 45.8%를 사가는 최대 고객이다. 104억 달러에 이르는 수입은 미국(34.4%), 과테말라(10.8%), 멕시코(6.8%)가 주요 대상국으로 원재료, 에너지, 전기, 생활용품 등이 주류를 이룬다.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원을 의미한다. 성인 로메로를 배출한 이 작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구원을 얻을 때는 언제일까.

로메로 대주교의 어록   

“평화는 두려움이나 공포의 산물이 아닙니다. 평화는 묘지의 침묵이 아닙니다. 평화는 폭력적인 압박의 조용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평화는 우리 모두가 모두를 위해 내놓는 관대하고 조용한 봉헌물입니다. 평화는 역동입니다. 평화는 관대함입니다. 그것은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느님의 무전기가 돼야 합니다. 여러분 각각이 하느님의 사자이자 예언자가 돼야 합니다.”
“선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독교 신앙은 더욱 긍정적이지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는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이 아직 부족합니다. 선한 사람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로메로 시성은 교황 갈 길 '이정표'

로메로의 시성은 프란치스코가 앞으로 나갈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다. 로메로는 프란치스코가 교황에 오른 뒤 시성을 승인한 892명의 성인 중 한 명이다. 15세기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800명의 순교자가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로메로는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인 중요성, 논쟁을 부른 정치적 이력,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밀접한 유대 관계 덕분에 로메로 대주교는 가장 중요한 시성 대상자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하기 오래전부터 시도돼왔다. 하지만 교황청 내부의 논쟁 때문에 제대로 진전이 없다가 프란치스코가 교황에 즉위하면서 시성에 필요한 절차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 과정도 관례대로 몇 년이 걸렸다. 문제는 그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시성식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데 지극히 중요한 순간인 지금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성식에 참석한주교단의 뒷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4일 바티칸에서 열린 시성식에 참석한주교단의 뒷모습. [로이터=연합뉴스]

교황 로메로를 '순교자'로-시성 급물살 

시성을 위해선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시성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고 적어도 5년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비로소 시성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 물론 특수한 경우에는 예외를 인정한다. 프란치스코의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2005~2013년 재위 뒤 선양)는 전임자인 요한바오로 2세의 시성 대기 기간을 줄였다. 요한바오로 2세는 58세 때였던 1978년 교황에 올라 2005년 선종했으며 오랜 심사 기간을 거쳐 2014년 성인이 됐다.

그런 다음 바티칸은 시성 심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변 사람에게 생전 삶에 대한 증언과 의견을 듣게 한다. 관례적으로 이 심사위원회는 해당 인물이 세상을 떠났을 때 머물렀던 지역의 교회 교구장이 설치하게 된다. 일단 신청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가경자’로 부르게 된다.

그 뒤 다음 단계인 시복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해당 인물이 세상을 떠난 뒤 그에게 기도를 한 결과 최소한 한 차례의 기적이 일어나거나, 자신의 믿음을 위해 순교했음을 확인해야 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자’로 선언함으로써 바로 그 해에 시복식을 거쳐 복자가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 선언으로 로메로 대주교는 성인으로 선포되는 시성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상당히 빠르게 이른 셈이다.

'신앙 좌파'의 아이콘이 된 로메로  

시성 과정은 더욱 어렵다. 일반적으로 2가지의 기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경우 1가지의 기적만 입증하면 된다. 로메로의 경우 엘살바도로의 세실리아 마라벨 플로에스라는 여성이 증언을 함으로써 기적을 인정받았다. 이 여성은 2015년 제왕절개수술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태로웠는데 남편이 로메로 대주교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한 결과 목숨을 구했다고 증언했다. 가톨릭 세계에는 성인이 하느님과 신도 사이를 중재한다고 믿는 전통이 있다. 성 마리아 고레티는 성폭행 생존자, 성 게라드 마젤라는 임신한 여성의 수호성녀다.
로메로의 시성은 그를 정치적으로, 영성적으로 모두 공경하는 엘살바도르 국민에게 특히 중요하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면서 사회정의와 평등세계 구현을 갈망하는 ‘신앙 좌파’에겐 아이콘 같은 존재다. 엘살바도르인들은 자국의 첫 성인이 되는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식 과정을 교회에서 한밤중에 중계방송으로 지켜봤다.

교회 개혁의 상징 바오로 6세도 시성 

로메로와 함께 시성된 바오로 6세 전 교황(1897~1978년, 재위 1963~78년)도 주시해야 할 인물이다. 바오로 6세는 재임 중인 1962~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고 가톨릭교회의 현대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한 인물이다. 과거 라틴어로만 봉헌하던 미사를 각국의 언어로 올리게 됐으며. 사제와 신자와 함께 제단을 보고 미사를 봉헌하는 대신 서로 마주 보고 미사를 진행하게 됐다. 동방교회와 화해하고, 개신교를 ‘분리된 형제’로 부르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다. 다른 종교에도 배울 점이 있다고 인정해 관용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 책임’을 교회의 책임으로 명시한 일이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행동에 나서는 근거가 됐다.

'산아제한·낙태 반대' 바오로 6세의 유산 

바오로 6세는 1993년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2012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가경자’로 각각 선포됐다. 그 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로 시복했으며(당시엔 대리인이 시복식 거행), 이번에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집전했다.
바오로 6세는 산아제한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이는 지금까지 바티칸의 변하지 않은 입장으로 남아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산아제한과 낙태를 “존엄한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는 ‘가벼운 문화’라고 비난해왔다.
바오로 6세를 시성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이어받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셈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도전 받는 산아제한과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도 슬기롭게 풀어야 하는 책임도 동시에 안게 됐다. 산아제한과 낙태, 그리고 자본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길이 주목되는 이유다.

교황, 앞으로 진보의 길 어디까지 갈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이후 진보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바티칸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를 격앙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바티칸 보수주의자들은 교황의 자본주의 공격이 오도된 것이며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의 시어도어 매캐릭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의 성 추문 사건을 알고도 이를 덮으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한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보수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북을 권유받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반도와 관련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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