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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로 그린 인상(印象)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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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호 27면

an die Musik: 드뷔시 ‘영상’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드뷔시의 ‘인상’ 음반. 헤이리 카메라타의 남자화장실 입구를 지키고 있다.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드뷔시의 ‘인상’ 음반. 헤이리 카메라타의 남자화장실 입구를 지키고 있다.

평일에 집에서 쉬게 되면 파주 헤이리의 카메라타(Camerata)에 가곤 한다. 카메라타는 방송인 황인용 선생이 운영하는 클래식음악 감상실이다. 집이 있는 일산에서 서울이 아닌 파주 방향으로 자유로를 달리면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을 맛본다. 평일이 좋은 이유는 카메라타가 붐비지 않기 때문이다. 오전 11시에 첫 손님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공간에 갓 내린 커피 향이 은은하다.

집에도 그럭저럭 오디오를 갖추고 있지만 카메라타의 시스템은 차원이 다르다. 콘크리트 벽 중앙에 대형 스피커를 매립하고, 좌우엔 웨스턴 일렉트릭의 거대한 혼(Horn)을 천장에서 드리운 체인으로 매달았다. 보기에도 압도적이다. 공간 우측 코너엔 음반으로 벽을 쌓고 그 속에 진공관 앰프와 턴테이블을 설치했다. 이곳의 기기들은 극장이나 방송국용으로 개발된 것들이라 일반 주택에 들여놓기 힘들다. 나는 잠깐의 드라이브로 그 깊고 넓은 스케일의 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으니 황 선생께 감사할 뿐이다.

2층 화장실 입구에 처음 갔을 때 나도 몰래 웃고 말았다. 남녀 구분을 음반 재킷으로 해 놓았다. 여자용은 므라빈스키 지휘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음반이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 같은 배경에 여자 얼굴이 큼직하다. 남자용은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드뷔시의 ‘영상/어린이차지’ 음반이다. 재킷에 드뷔시 초상화를 썼다. 여자는 오른쪽, 남자는 왼쪽을 보고 있어서 화살표도 필요 없다. 황인용 선생이 두 음반을 고른 것은 남녀 얼굴의 크기와 방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 명연주라 생각했기에 그토록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 아닐까.

드뷔시 음반은 널리 알려진 명반이다. 미켈란젤리의 ‘영상(Images)’연주는 첫 손에 꼽힌다. 그런데 입문 초기에는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흐릿하고 모호했다. 제대로 뚜벅뚜벅 걷지 않고 갈지자로 비틀거린다는 느낌도 들었다. 바흐의 음악은 기계처럼 착착 맞물려 돌아간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소나타들도 고전적 뼈대가 만져진다. 그런데 드뷔시의 건반음악은 손에 잡히지 않고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 같았다.

카메라타의 화장실 앞에서 드뷔시를 만난 순간 ‘영상’은 숙제가 되었다. ‘다들 좋다는데 왜 나한테는 이상하게 들릴까?’ 이럴 때는 진면목이 보일 때까지 듣고 또 듣는 수밖에. 어느 순간 드뷔시가 상큼했는데, 그것은 정장을 벗어던지고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푼 느낌이었다. 바흐, 베토벤 음악의 틀을 내려놓으니 드뷔시가 들렸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가다. 인상(印象)이라는 말은 모네의 그림 ‘해돋이-인상’에서 비롯됐다. 모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노르망디의 항구를 스케치한 작품이다. 조그만 배들이 새벽바다에 떠 있고 푸르스름한 덩어리들은 숲인지 배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그 뿌연 바탕에 한 점 붉은 해가 찍혀 있다. 화가는 해 뜨는 모습에서 받은 인상을 빠른 붓질로 그렸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이나 앵그르의 ‘터키 욕장(浴場)’의 정밀한 세부묘사에 익숙한 눈에는 엉성하게 보였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원래 조롱 섞인 작명이었다. 그러나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가 스냅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그린 인상주의 화풍은 문학과 음악에도 생명을 불어 넣었다.

드뷔시는 피아노로 그림을 그렸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살, 흔들리는 나뭇잎과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퇴락한 절에 비치는 달빛, 잉어가 헤엄치는 모습까지. 처음엔 흐릿했으나 이젠 빛과 소리, 움직임을 오롯이 느낀다. 요즘은 카메라타 화장실 앞에서 드뷔시를 만나면 “숙제 다 했다”고 말해 준다. 그가 떠난 지 올해로 100년이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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